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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1
익명
2018-02-08 22:54:09
이 지난한 논쟁의 본질은 찍먹충들이 '젖은 튀김'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튀김은 바삭한 순간에만 튀김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가깝게는 떡볶이 소스를 끼얹어 먹는 분식집 튀김으로부터 - 멀게는 돈카츠를 국물에 담궈먹는 가츠나베, 튀긴 누룽지를 걸쭉한 국물에 넣고 끓인 중국식 누룽지탕까지, 바삭하게 튀겨낸것을 굳이 다시 축축하게 적셔먹는 예는 수도없이 많다.
튀김과 소스의 관계는 단지 묻었냐, 안묻었냐 하는 0과 1의 선택지가 아니다. 튀김의 조리과정을 보자. 튀김옷이 열에 익어 딱딱해지는 동안 반죽내의 수분이 기화되어 날아가면서 다공질의 조직을 형성해낸다. 이것이 바스락거리면서도 포근한 튀김의 식감을 만들어내지만 그 식감만이 튀김이라는 조리법의 유일한 장점은 아니다. 튀김옷의 미세한 구멍속에 소스가 스며들었을 때, 다른 어떤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다량의 소스와 원재료를 자연스럽게 한입에 넣을 수 있게된다. 여기에 튀김옷의 주성분인 전분, 밀가루 등 탄수화물 조직의 푹신함과 기름의 풍미가 더해져 '젖은 튀김'만의 맛과 가치가 생겨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한가지 있는데 바로 시간이다. 위에 설명한 '젖은 튀김맛'을 제대로 즐기려면 튀김옷의 미세한 구멍들 속에 소스가 충분히 스며들만한 시간을 주어야 하지만, 적정한 시간을 초과할 경우 소스의 수분에 의해 튀김옷 조직이 분해되기 시작하면서 다공질 구조가 무너지고 흐물흐물해져 젖은 밀가루떡으로 변하고 만다. 즉, '젖은 튀김'의 맛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선 다음 두가지 사항을 꼭 지켜야 한다. 소스가 스며들 시간을 주되, 튀김옷이 분해되기 전에 먹을것 - 후자는 배달 탕수육이 소스를 따로 담는 이유이고, 전자가 바로 찍먹이 대안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젓가락에 쥐어진 마른 튀김이 소스에 살짝 찍혀 입으로 올라가는 동안의 짧은 시간만으로는 결코 점도높은 탕수육 소스가 튀김옷에 충분히 스며들 수가 없는 것이다. 즉 찍먹은 '젖은 튀김'을 제대로 구현해낼 수가 없다.
(논점을 흐릴까 싶어 망설여지지만 잠깐 담먹에 대해 얘기하자면, 담먹또한 부먹의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젖은 튀김론'의 관점에선 담먹또한 부먹만큼이나 합당해보이나, 탕수육 소스는 전분이 첨가돼 걸쭉한 상태라는 점이 문제가 된다. 부먹의 경우 소스를 붓고 먹기까지의 미묘한 시간동안 소스가 스며드는 동시에, 스며들지 못한 소스가 중력에 의해 떨궈지는 작용또한 일어난다. 그래서 적당량의 소스만 튀김에 딸려오지만, 담먹을 할 경우 젓가락으로 들고 일부러 소스를 떨궈내지 않고서는 탕수소스의 점성때문에 항상 과한 양의 소스가 따라올 수밖에 없다.)
누구나 진리로 인정하는, 우리 식생활의 정점이자 무한한 줄거움의 원천, 신성불가침한 존재인 치느님을 생각해보자. 양념치킨의 튀김옷을 과연 '바삭'하다는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브랜드와 레시피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분명 그것은 바삭과 눅눅함, 그 중간 어딘가에 위치한 바로 그 식감이다. 살포시 젖었으나 아직 튀김옷의 조직은 해체되지 않은, 바삭함과 눅눅함의 중간상태 - 이것이 양념치킨만의 매력이듯이 부먹으로 인해 소스가 튀김옷에 적절하게 스며든 상태가 바로 탕수육이라는 요리의 특별한 점이고, 기동력이 중요한 배달 중식에서도 찍먹으로는 반의 반도 소비하지 못할 대량의 소스를 꼭 따로 포장해서 보내는 이유인 것이다.
나는 찍어먹지 말라는 말을 하고픈것이 아니다. 오직 찍먹이 바삭한 식감을 유지한다는 점만을 들어, 그것이 개량되고 우월한 취식법이라 주장하며 부먹을 매도하는 우매한 자들에게 그 얼마나 편협한 시각인지 일깨워주고 싶을 뿐이다. 물론 갓 튀겨진 바삭한 탕수육 고기는 정말 맛있다. 골수 부먹론자인 나도차도 정말 잘 튀겨진 탕수육이 왔을 때는 소스를 붓기 전, 김이 모락모락나는 바삭한 고기튀김을 한두조각 집어먹어보곤 한다. 오죽 그 맛이 좋으면 오래된 중화요리집에선 소스없는 탕수육을 '뎀푸라'라 하여 별도 메뉴로 팔고 있겠는가. 그러나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탕수육은 왜 튀김과 걸쭉한소스로 구성되는가, 어째서 그것을 서빙전에 부어(혹은 볶아) 내는 형식을 취하게 되었는가, 이 점을 부디 깊이 생각해보건대 부먹이 본질이고 찍먹은 응용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점이다.
모름지기 맛이란 것은 취향의 문제이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먹든 남이 뭐라 할 권리는 없다. 그러나 위에 구구절절 설명한 것 처럼 부먹을 선호하는 많은 사람들은 단지 튀김의 바삭함을 즐길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바삭함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크리스피하면서도 크리미하고 리치한, '젖은튀김'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 맛의 차원을 이해할때, 탕수육 소스를 붓지 말고 먹으라는 요청 또한 그네들이 주장하는 '폭력적인 강요'에 다름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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