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인지 밤인지도 구분이 안갈정도로 어두운 방 안에

몇십명의 사람들이 커다란 원탁을 둘레로 서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 정확한 외모는 알수가 없었지만

모두 자신들 특유의 자세로 탁상 주위에서 의자에 앉아

자신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어떤이는 팔짱을 끼고 꼿꼿히, 어떤이는 양 팔을 탁상에 짚은 체로,
늙은이로 보이는 구석의 그림자는 지팡이에 쓰러질듯한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각기 다른포즈, 각기 다른생각을 가지고 있을 이들이었지만 단 한가지의 공통점이 그들을 이 자리에까지 오게 했다.


모두가 어두운 얼굴을 한 가운데 원탁 중앙에 서있던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정말로 검은색인지는 알수 없지만 워낙 어두워 그 색이 명확하지 않으니 검은색이라 하자.)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 주의를 한번 둘러본 후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이상 이렇게 당하고만 살수는 없습니다. 우리들도 인권
이 있으며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어떤이들은 말하겠지요.

'인권이든 권리든 뭐든 외치기 전에 너희들이 지금까지 해온 꼬락서니를 봐라!' 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오로지 백색선전에 의해 우리들은 언제나 암울하며 사악한 무리로만 치부되어왔고 소위 영웅이라는 자들의 악행은 일반인들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는것입니다!"


그 어조는 심각하기 그지 없었다. 주위의 검은 그림자들이 검은색 정장의 남자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른 악한자들에게 소위 '조연', 혹은 '악역'이라고 불리우며 '주연', '영웅', '정의'라는 선의의 탈을 쓴 악마들에게 짓밟히고, 멸시당하고, 무시당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권리만을 행사할줄 알며 정작 우리의 문제따위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예로 들어볼까요? 저는 사실 세상에 질려 깊은 숲속에 별장하나 지어두고 고요를 벗삼아 사는 중년에 불과했습니다. 뭐, 그 산에서 살인마가 있다든지 하는 이야기는 있었으나 저는 그런것에 겁먹을 사람이 아니었으니 말이죠.

그런데 어느날 어떤 일행이 나타나더군요. 그리고는 날이 어두우니
잠시 저희 집에서 묵겠다고 하기에 저는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연들이 써먹는 가장 흔한 '악당들의 집에 몰래, 혹은 모르는척 침입하기 (이건 그들이 쓰는 명칭이지 제가 만들어낸것이 아닙니다. 오해소지가 없길 바랍니다.) 이었던 것인줄 저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겁니다. 그리고 며칠후 녀석들은

'이 산속에서 살인마가 사람을 해친다는 이야기가 있더니 바로
당신이었군요! 전 이 근처에서 사람의 뼈를 발견했습니다. 이제 그만 발악을 그만 두시죠."

어쩌고 하더니 저를 생판 만나보지도 못한 살인마로 내모는것이었지요. 그리고 지금은 이런 꼴이지요. 모든것을 잃은후 그들에게 복수만을 꿈꾸며 지내고 있습니다."


조용히 그의 말을 듣던 사람들은 웅성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중에 키가 큰 남자가 그의 말에 수긍하며 자신도 덧붙이기 시작했다.


"맞아, 나도 애인에게 차여서 '나도 애인에게 복수할테다. 두고보라지, 그녀보다 더 예쁜 여자를 사귀고 말거야!.' 라고 생각하고는 옆 테이블 여자에게 말을 건것 뿐이라고. 그런데 놈들은 나를 치한으로 몰더니 그 주점에서 실컷 패고는 쫓아냈어. 망할것들."


"나도, 나도 그랬어. '세상이 꼭편견으로만 가득찬건 아닐테지'라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왠걸. 내가 괴물 이라는 이유만으로 내 집 마당에 무단침입하고는 '조심해! 오우거의 동굴이다!.' 라고 외치고는 몽땅 뒤집어 엎고는 나갔다고."


뒤에서 자신을 '검은산의 젠틀한 괴물'라 밝힌 크고 뚱뚱한 괴물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그들의 말에 동의했다.

그의 말을 시발점으로 '주연'들에게 당해왔던 '조연'들의 분노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난 감옥의 경비병이라는 이유로 녀석들이 탈출하면서 날 때렸어!"


"제길,어떤놈들은 내 주점에서 별 깽판을 다 쳐서 탁자니 테이블이나 다 부숴놓고는 수리비도 안내고 가버렸다고!"


"난 시범으로 캐스팅한 마법에 맞아죽을뻔 했어."


모두의 불만이 터지자 방안은 금방 시끌벅적해졌고, 그들은 모두 흥분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러자 맨 처음 말을 꺼냈던 검은정장의 중년남자가 흥분을 진정시켜야 된다는것을 알아차리고는 장내를 진정시켰다.


"네, 여러분 모두의 고충을 이해합니다. 아니, 이해할수밖에 없습니다. 저 또한 같은 일을 겪어온 동료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흥분은 나중까지 미뤄두시길 바랍니다. 이제 곧, 여러분의 모든 분노와 흥분, 적의를 쓰게 될 때가 오게 될것입니다."


그의 말에 소란은 수그러 들었고 모두가 귀를 귀울였다.


"에, 저희는 지금부터 철저히 모든 주연, 영웅이라 불리는 자들을 찾아내어 뿌리까지 뽑아버릴것입니다! 그들에게 지금까지 우리가 당해온 모든것을 갚아줄것이며 그들을 죽음과 고통의 구렁텅이로 밀쳐버릴것 입니다!"


"옳소!"

"죽여라!!"


장내는 전보다 한층 더 열기로 달아올랐고 검은색정장의 중년을 그것을 말리지 않았다.

그 또한 주위의 사람들처럼 흥분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힘차게 선언했다.


"저희의 모든 작전과 인력, 그 모든것을 동원하여 그들을 이 세계에서 완벽히 없에 버릴것입니다!"


그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어두운 방은 함성에 파뭍혔다.

'쉽게잊혀지는 얼굴들의 반란' 이라 명명된 이 투쟁은

몇년간 계속되었다.

수많은 조연들이 죽었고 수많은 엑스트라들이 죽어나갔다. 주연들은 강력했으며 영악했다.

하지만 그들이 미쳐 간과하지 못한것이 하나 있었다.

"어서 죽여버려!"

"잘난척이 하늘을 찌르는 놈들!"

마을 광장에는 죄인들을 처형하기 위한 사형장이 있었고 그 단상 위에는 대여섯명의 일행이 있었다. 단상 주위로는 울타리가 쳐져있었고 울타리 너머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단상의 일행들을 보며 험상궂게 외쳐대고 있었다.


이것은 지난 몇년간 이루어져온 '영웅말살작전'중 하나로 각각의 마을에 그들이 솔깃해 할만한 이야기를 하나씩 퍼뜨려 그들을 유인하는 작전이었다.

가령 '그 마을 광산에는 비밀의 보물이 숨겨져 있다더라' 라던지 '어떤 마을이 악마에게 시달리고 있는게 그 악마를 무찌르면 엄청난 보상이 있다' 라는 이야기를 퍼뜨려 방방 곡곡의 주연들을 마을로 끌여들이는 작전이었다.

그리고 그 후의 일 처리는 지금과 같은것이다. 그들이 전적이 확인 되면 바로 사형장으로 집행, 즉결 처분인것이다.


단상에 묶여있는 일행중 꽤나 말끔하게 생긴 금발의 청년이 무릎이 꿇은체로 소리쳤다.

"이보라고! 우리가 도대체 무슨잘못이 있다고 이렇게 어이없는 짓거리를 하는거지?"

옆에 있던 학자풍의 중년남자의 그의 말을 받아서 이었다.


"맞소. 우리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 이유를 들어봐야 하지 않겠소. 만약 우리가 잘못이 있다면 처벌을 받는것은 당연하지만 그 이유를 알지도 못하고 우리가 죽는다면 당신들에게도 의미가 없는것 아니겠소."


그의 논리정연한 말에 울타리 주위의 사람들이 수근수근 거리며 서로를 쳐다봤다.

그것을 본 중년남자는 이때다 싶어 다시 말을 시작했다.


"우리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는 확실히 알수 없지만, 만약 잘못이 있다면 달게 받겠으니 이 포박을 풀어주시오. 이미 믿음이 각박해진 세상에 한줌 인정이라는게 남아 있을것이라 나는 믿소. 그것이 설사, 자신의 생존을 위한 가식적인 인정이라 할지라도 말이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오. 우리들을 죽인다해도 그뿐이오, 그 다음 무엇이 있겠소? 당신들의 마음이 후련해지겠소? 그렇지는 않을것이오. 오히려 당신들은 더 가슴아파할지도 모르지. 우리에겐 폭력과 광기가 아닌 타협과 대화가 필요하오."



그의 일장 연설에 모두가 감동한듯 했고 주위는 숙연해졌다.

그리고 그의 말에 감동한 누군가가 가슴벅찬 소리로 외쳤다.



"놀고있군."



그 가슴벅찬 소리를 듣고는

또 다른 사람이 눈시울을 글썽이며 말했다.



"변명은 이제 끝인것 같군. 태워버리라고."



시민들의 말에 감복한 주연일행들은 감동하여

단상에서 거의 발악을 하듯 소리쳤다.


"저,저기 그런뜻이 아니라.."

"제길, 지금까지 뭘 들은거야!"





그렇다. 그들이 미쳐 간과하지 못한점. 그들의 수는 주연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질보다 양'이라는 선인의 말씀과 '말보다 주먹이 먼저'라는 오래된 진실이 실로 확인되는 것이었다.

주연들이 10명의 조연들을 없에면 조연들은 50명이 몰려가 그 한명을 없에버렸으며 온갖 비열, 간악, 사악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을 사살했다. 식당에서 모든 음식에 독을 투입한다든지, 그들의 연인들을 인질 삼아 하나하나 죽여갔다.


영웅들은 그들에게 비겁하고 잔인하며 사악한 자들이라 치를 떨었지만 그들이 당해온것은 그들이 지금 행하고 있는 행위보다 더 악랄하기 그지 없었기에 그리 신경쓰지 않았다.


주연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어갔고 결국 수적우세를 뒤엎을수 없었던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렸다.

조연들이 승리한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승리를 축하했고, 더이상
핍박받지 않는 세상이 온것을 축하했다. 여기저기서 축하를 하는
잔치가 벌어졌다.



이 일의 주요인사들 또한 그 옛날 자신들이 모여 훗날을 도모했었던 원탁이 있는 방에 모여 그들의 승리를 축하하고 있었다. 그때와 틀린점이 있다면 모두의 얼굴이 훨씬 밝았고, 방엔 창문으로 빛이 들어와 모두의 얼굴이 명확히 드러났다. 모두가 약간씩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그런것은 지금 이 자리에선 신경쓸 바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이 모든일을 이끌어 왔던 대장격이나 마찬가지인 검은 정장의 중년신사가 원탁 중앙에 서 있었다. 그는 언제나 그래왔던것 처럼 제일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까지 모두가 수고해 주셨습니다. 저희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워 주신 모든분들께 지금 이자리에서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모두 고군분투 해주신 덕에 저희가 이 자리에 우리의 권리를 쟁취하여 서 있을수 있으며 살아있을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즐길 여유도 생겼군요."

그의 말에 모두가 즐거워 하며 동의의 의미로 어떤이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조금 외향적인 자들은 소리를 질렀다. 모두가 즐거웠을것이다. 자신들의 노고와 고통이 이제서야 빛을 발하게 된것이다.

어떤이는 미친듯이 웃어댔다. 모두가 그 웃음소리에 한껏 동조해 같이 웃어버리다 그 웃음이 정말로 '미친듯이'웃는 소리라는것을 알아채고는 입가에서 웃음을 지워버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 웃음소리의 장본인에게로 향했다. 그는 방의 문 앞에 팔짱을 끼고는 기대어 있었으며 계속해서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몇분이 지나도록 그의 웃음이 끊이지 않자 방 안의 사람들은 그의 폐활량이 좋다는 생각보다는 위험하기 그지없는 미친놈으로 결정짓기로 하고는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지금껏 자신의 술집을 결투장으로 알고 온통 때려부수는 녀석들을 처리하고는 걱정을 덜게된 술집주인 켄이 그에게 말을걸었다.


"이봐, 당신 뭐야?"



방 문앞에 기대고 있던 그는 켄의 말에 웃음을 멈추고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한없이 평범하게 생겼었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이질감을 그들에게 선사했다.



"내가 누구냐, 그래 그건 인간들이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해온 질문이지. 난 누구지? 하고 자기 자신에게 물어본다면 일단은 가장 먼저 하나의 생명개체 라는 생각을 할수 있을것이고 더욱 파고 들어간다면 생각을 하는 고등한 생물이며 자기 자신(깊은뜻에서의 자신이야. 자신의 목숨을 생각하는건 토끼라도 할수 있겠지?)에 대해 생각할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짐승이라고 할수 있지만 댁이 바라는건 이런 대답이 아닐테지?"


그것은 당연한것이었기에 그들은 따로 대답을 하지 않았고 그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다시 말을 이었다.



"후후... 듣고 놀라지 말라고. 난 이 세계의 창조자, 모든것의 파괴자, 이세계의 유일한 신이다!"



그의 외침에 모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것이 무엇을 가르키는것인지 알고있기 때문이리라. 모두가 혼란에 빠졌으나 정장의 중년남자는 겨우 자신을 진정시키고는 질문했다.


"그렇다는 것은 당신은 짱세라는 말 아니오! 우리를 만든것도 당신이고, 이런 결말을 만든것도 당신일텐데... 왜 지금 나타나서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는거지! 이제 주연들은 모두 죽었어, 당신도 그걸 원한거잖아!"


거의 악을 쓰듯이 그는 외쳤고 짱세는 되받아 쳤다.


"결말? 난 결말을 아직 내지 않았어. 결말로 치닫고 있긴 하지만 말이야. 그리고, 자네 말이 맞아."

"난 모든 주연이 죽는걸 원했지. 확실히. "


"그럼 된것 아니오.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였고 이제 우리만이 남았.. 서,, 설마!!"


갑자기 맑던 하늘은 어둠으로 뒤덮였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던 빛은 구름에 의해 차단되었고 가끔씩 내리는 빗물이 창문틀에 부딪쳤다.

실로 짱세의 능력은 대단했다.

손가락끝으로 날씨마저 마음껏 주무를수 있다니 말이다.

짱세라 불린자는 어둠에 의해 더욱 공포스러운 얼굴로 변해있었다.
그는 쇠를 긁는듯한 음성으로 그들에게 질문했다.



"그래... 이 단편의 제목이 뭐지?"


모두가 대답하지 않고 꼼짝없이 얼어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이 소설의 제목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설의 제목이 의미하는 진정한 뜻을 알게되었다. 자신들이 이제 곧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 또한말이다.


"거짓말이야!"

"이 악마!"


모두가 절망에 찬 음성으로 외쳐댔고, 그에게로 돌진했다. 불로 뛰어드는 나방과 다름없다는것을 그들은 알고있으리라.


"그래, 이제 시간도 없고 더이상 이어나갈 이유도 없으니 여기서 당장 쓸어주지. 자, 난 화려하게 끝마치는걸 원하긴 하지만 그러기엔 나의 문장력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군. 난 그저 칼을 몇번 휘둘렀고 너희들은 종잇장 찢어지듯이 죽어나갔다고 하지."


짱세는 그저 칼을 몇번 휘둘렀고 그들은 종잇장 찢어지듯이 죽어나갔다. 방안은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다는 듯이 깨끗해져 있었다. 짱세는 의자에 앉아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 이제 이야기를 끝내면 되겠군. 진정으로 '주연'들이 모두 죽었으니. 녀석들도 이해해 주겠지. 이 이야기에서 만이라도 주연을 경험했으니 말이야."

"진정한 주연마저 다 죽어야,

이 소설은 끝나게 되있는 법이거든."


그리곤 그는 무언가 생각이 난듯 일어서려다 말고 중얼거렸다.

"아니 잠깐. 그럼.. 이 소설의 진짜 주연은 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