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제 일하러 갈 건데 말이지. 집에서 쉴래?”

명덕의 물음에 소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같이 갈래? 안 힘들어?”

소녀의 고개가 끄덕여 지는 걸 보고 명덕은 소녀의 손을 잡고 지하철역 입구로 향했다. 출근시간을 훌쩍 넘겼기 때문일까, 입구 근처는 그리 분주하지 않았다. 명덕은 입구계단 중간에 자리잡고는 보따리를 내려놓았다. 소녀가 보따리에 달라붙어 매듭을 풀었다. 보따리가 펼쳐지며 속에 들어있던 인형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명덕은 소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인형을 하나들어 소녀에게 건넸다. 어제 소녀가 안고 자던 인형이었다.

“심심할 테니 이거라도 가지고 놀라고, 별로 재미는 없겠지만 말이야.”

명 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녀는 이미 보따리 옆에 쪼그리고 앉아 몇 개를 더 집어 들고 놀고 있었다. 명덕은 쓴웃음을 짓고는 소녀의 옆에 주저앉았다. 굳이 호객을 할 필요는 없었다. 이 시간에는 어차피 손님을 찾아보기 힘들 터였다. 좀 있다 옆의 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하교 할 때쯤이나 몇 개 팔 수 있을 것이다. 명덕은 점퍼 호주머니를 뒤쳐 조그마한 핸드북을 꺼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옆에서 놀고 있는 소녀를 한번 흘끗 바라보고 그는 책을 펼쳤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명덕이 책을 거의 다 읽어갈 때쯤 해서 역 주위에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불어나고 있었다. 명덕의 시선이 집에서 가지고 나온 탁상시계로 향했다. 12시 40분. 아마 주위의 사무실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점심시간이라고 나오는 모양이었다. 소녀는 인형을 가지고 놀다가 지쳤는지 인형 두 개를 양 손에 하나씩 들고 옆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명덕은 책을 덮었다. 별로 팔리지는 않겠지만 열심히 한다면 한두 개는 팔 수 있을 터였다.

“인형 사가세요- 손으로 직접 깎아 만든 나무 인형입니다.”

명덕의 눈앞을 몇 명의 사람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모두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이곳에서 장사할 때가 제일 많다보니, 고정적으로 이 주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낯이 익었다. 아마 그들도 마찬가지로 명덕의 얼굴이 익숙하리라.

“신랑, 신부 인형. 축구하는 꼬마 인형. 소꿉놀이하는 소녀 인형. 종류별로 없는 게 없습니다! 손으로 직접 깎은 인형 사가세요.”

명덕의 목소리에 잠이 깼는지 소녀는 어느새 일어나 호객하는 명덕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명덕은 그런 소녀에게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다시 호객을 계속했다.

“으아아-하나도 못팔아 버렸네.”

명덕은 머리를 감싸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러자 소녀가 의아한 듯이 명덕을 바라보았다. 명덕은 피식 웃으며 소녀의 머리를 손으로 헝클어트렸다.

“아무것도 아냐. 짜식. 걱정하기는”

소녀는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인형을 바라보았다. 소꿉놀이 하고 이는 소녀의 인형이었다. 갑자기 소녀가 인형을 들고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명덕은 놀라 소녀는 소리쳐 불렀다.

“어어, 수현아. 어디가! 이리와! 얼른!”

그러나 소녀는 명덕의 말을 들은 척 만 척 인형을 들고 걸어갔다. 명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때, 소녀가 길을 가던 노인 한 명의 코트를 잡아당겼다. 노인이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소녀는 노인에게 인형을 내밀었다. 그러자 노인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응, 나 주는 거니?”

소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리고는 명덕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이해했다는 미소를 짓고는 명덕에게로 다가갔다. 소녀를 붙잡으려고 일어섰던 명덕은 벙찐 얼굴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아까 소녀가 자기에게 내민 것과 똑같은 인형을 집어 들었다.

“얼만가?”

“아..예. 삼천원입니다.”

노인은 계속 얼굴에 미소를 띄운 채로 소녀 인형과 강아지 인형을 더 집어 들었다.

“손으로 깎은 건가? 잘 만들었구먼.”

“아..감사합니다.”

명덕은 아직도 살짝 당황한 상태였다. 노인은 그런 명덕을 보고는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그에게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내밀었다.

“자, 이렇게 세 개만 주게.”

명덕은 얼떨결에 돈을 받고는 고개를 속였다. 거스름돈을 찾느라 주머니를 뒤적뒤적하는 그를 노인이 제지했다.

“됐네. 자네보고 사는 게 아니라, 자네 딸내미가 너무 귀여워서 사는 거니까. 그걸로 딸내미 아이스크림이나 하나 사줘. 그럼 많이 팔게. 너도 잘 있거라. 아버지한테 맛있는 거 사달라고 하고.”

노 인은 미소를 띄운 채 소녀에게 손을 흔들고는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갔다. 명덕은 살펴 가시라고 인사를 할 후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자리에 주저앉아서 명덕이 덮어놓은 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명덕은 소녀의 옆에 앉으며 소녀에게 꿀밤을 콩 먹였다.

“갑자기 놀랐잖아. 임마, 너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 알았지? 나 너 그런 일 시키려고 데리고 나온 거 아냐.”

소녀는 머리를 손으로 문지르며 약간 울상이 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엄하게 말하려 했지만 그런 소녀의 표정을 보고 명덕은 그만 풋 웃고 말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어쨌든 아이스크림은 사먹어야겠지? 얼른 슈퍼로 뛰어가서 사오자!”

소녀가 명덕의 손을 잡았다. 명덕은 소녀를 끌고 근처에 있는 슈퍼마켓을 향해 뛰었다. 이제 표정을 두 가지 본 건가. 다음 표정은 되도록 웃는 표정이었으면 좋겠는데. 명덕은 마음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슈퍼에 가는 길에 분식집에서 아예 수현이 점심도 먹여야겠군. 아침을 조금밖에 먹지 못해 배가 고플 터였다. 어제 보여준 먹성을 생각하면 말이다. 왠지 뜨거워지는 마음에 명덕은 소녀를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아저씨! 일어나요! 장사해야죠!”

높은 톤의 목소리에 명덕은 눈을 떴다. 인심 좋은 분식집 아주머니 덕택에 배불리 먹고 오고 나서 손님도 없고 하니 조금만 쉴까-하고 눈을 감은 것이 꽤 오래 자버린 모양이었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몽롱하던 시야를 또렷하게 하고 나니 교복을 입은 여학생 몇 명의 모습이 보였다. 명덕은 멋쩍은 듯 웃었다.

“아, 너무 많이 자버렸더구나. 학교 벌써 끝났니?”

“아이 참, 아저씨도. 우리 학교 금요일날은 4시면 끝나는 거 아시잖아요. 오늘은 야자도 없고.”

“에엣, 벌써 4시가 넘었어?”

명덕은 깜짝 놀라며 옆에 탁상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의 바늘은 네 시 이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여학생들은 자기들끼리 킬킬 웃었다. 잠시 후 그들 중 한명이 휴대폰을 꺼내 명덕에게 시계를 보여주었다. 한시 이십분. 명덕은 투덜대며 탁상시계의 바늘을 한시 이십분으로 돌렸다.

“어른을 놀리면 못써. 단축수업 했나보구나.”

여학생들은 다시 한 번 까르르 하고 웃었다. 그 소란에 잠을 깼는지 소녀가 몸을 뒤척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 모습을 본 여학생들은 탄성을 지르며 소녀를 둘러쌌다.

“어머-아저씨 딸 있었어요?”

“꺄아-! 너무 귀여워!!”

여학생 중 한명이 소녀가 너무 귀여웠는지 자신의 볼에 대고 비볐다. 소녀는 깜짝 놀라며 명덕에게로 도망쳤다.

“에이- 낯가리네. 고 녀석. 아저씨 딸이에요? 아니면..혹시 아저씨가 만든 인형!?”

“떽! 사람보고 인형이라니”

명덕은 웃으며 짐짓 화를 냈다. 여학생들은 뭐가 좋은지 또 마구 웃어댔다.

“아저씨. 오늘 윤아 남자친구랑 100일이래요. 얘 오늘 아침부터 아저씨 인형 선물로 줄 거라고 오늘 안 나오면 어떡하지-하더니, 아저씨 오늘 나와서 정말 다행이네요.”

“윤아 남자친구 있었어?”

명덕이 놀라는 체 하며 윤아라고 불린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윤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인형 뭐 살지까지 정해왔어요. 아저씨. 저기 신랑인형하고 신부인형하고 주세요.”

윤아가 인형을 지목하지 옆에 있던 학생들이 우우-하며 야유를 보냈다. 윤아는 그저 싱글벙글하고 있을 뿐이었다.

“왜, 결혼할라구?”

명덕은 짓궂게 웃으며 신랑신부 인형과 왕자와 공주 인형을 들어 윤아에게 내밀었다.

“자, 이건 내가 주는 선물이다. 백일 축하해.”

“와- 감사해요! 이것도 진짜 이쁘네-”

윤아는 명덕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인형들을 들고 온 조그만 가방에 집어넣었다. 옆에서는 부럽다-, 나도 줘요-등의 소리가 장난스럽게 계속 들려왔다. 명덕은 웃으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배 아프면 너희도 남자친구 만들어와! 선물 얼마든지 줄 테니.”

“정말이죠?”

여 학생들은 또 자기들끼리 깔깔대더니 가야겠다며 명덕에게 인사했다. 명덕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여학생들이 빠져나가자, 명덕은 갑자기 확 조용해져 버린 주위를 둘러보며 혼자 픽 웃었다. 길가에는 이미 하교생들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아이들이 늦게나온 편인 모양이었다. 소녀는 오랜만에 소란스러운 걸 겪었는지 정신이 반쯤 나간 얼굴로 앉아있었다. 명덕은 그런 소녀를 보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너는 남자친구 없냐? 아이구-오늘 완전 졸았는데도 평소보다 오히려 많이 팔았네.”

그의 얼굴에 만족감이 떠오른다. 한 시 반까지 다섯 개라. 괜찮은 수입이다. 이대로만 가면 손님이 가장 많이 오는 퇴근시간에는 열 개 넘게 팔 수 있을 터였다. 명덕은 기지개를 한번 쭉 폈다.

그때였다. 아까 친구들과 함께 아래로 내려갔던 여학생 중 한명이 헐레벌떡 계단을 뛰어올라왔다. 명덕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여학생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고르려는 듯 잠시 있다가 이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저씨! 아저씨, 아래서 잡상인 단속이요. 곧 올라올 거예요.”

명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재빨리 인형을 보따리 안으로 쓸어 담기 시작했다.

인형을 담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몇 초가 채 안 돼서 떠날 준비를 마친 명덕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그를 의아한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저놈들은 꼭 와도 이럴 때 오니. 오랜만에 내가 딸내미를 데리고 왔는데 말야. 자, 이따가 설명해 줄 테니 일단 어서 이곳을 피하자고.”

명덕이 손을 내밀었다. 소녀는 손을 잡는다. 명덕은 인형보따리를 어깨에 들쳐 메고는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소녀는 그런 그의 손을 잡고 쫄래쫄래 명덕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지하철역이 시야에서 멀어졌을 때 쯤. 명덕은 걸음을 멈추었다. 소녀의 눈이 곧바로 그를 향했다. 어서 설명하라는 듯한 소녀의 눈빛에 명덕은 실소를 흘렸다. 이런 어린 아이가 잡상이 단속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귀찮은가 보다. 저 역에서는. 하고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소녀가 그런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명덕은 살짝 미소를 띄운 채 고개를 돌렸다. 언젠가는 보여줬어야 할 모습인걸.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하아암-

시 간이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하품이 나온다. 그의 하품이 전염됐는지 소녀는 작은 입을 최대한 크게 벌렸다 닫는다. 음, 오늘은 이만 들어갈까. 하고 생각했던 명덕이 한번 입맛을 쩝 다셨다. 제일 대목은 저녁인데 말이지. 명덕은 길가의 가게 안에 있는 시계를 흘끗 바라보았다. 두시 오 분 전인가. 집에 돌아가기엔 아직 좀 이른 감이 있었다.

“좋아. 이 근처에 아무데나 펴고 앉아서 좀 있다가 어둑어둑 해질 때 쯤 돼서 돌아가자. 안 피곤해?”

소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고것 참. 아까는 하품까지 해댔으면서. 명덕은 소녀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고는 자리를 펴고 앉을 곳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수고하십니다-”

명덕은 포장마차의 천을 걷고 안으로 들어서며 크게 인사했다. 곧 이어 포장마차 아주머니의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워메, 민 서방 왔는가? 이틀 연속 오기는 오랜만일세. 뭔 바람이 불었당가? ..워메? 요것은 누구여?”

아 주머니의 눈이 명덕의 뒤를 따라 쫄래쫄래 들어오는 소녀에게 향했다. 명덕은 뒷머리를 긁으며 씩 웃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뒤의 냉장고에 넣어져 있던 소주 한 병을 꺼냈다. 그 모습을 본 명덕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 오늘은 애도 있고 하니 안 마실랍니다. 닭똥집이나 굵직굵직한 걸로 몇 개 볶아주십쇼. 순대도 좀 썰어주시고”

아 주머니는 명덕이 쥐어준 이쑤시개를 양손에 들고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앉기에는 조금 높은 의자에 올라 앉아 있는 소녀를 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꼬마 아가씨 배고픈 듯 하니니 순대부터 좀 썰겠소잉. 짙은 전라도색이 느껴지는 말을 내뱉고 시루에서 순대를 뭉텅 잘라서 도마 위에 올려놓고 슥슥 썰기 시작하는 아주머니를 보던 명덕의 눈이 살짝 추억에 잠긴 듯 잠시 몽롱해졌다가 이내 본래대로 돌아왔다. 명덕은 아주머니가 내미는 순대그릇을 받아 소녀 앞에 내려놓았다. 배가 고팠는지 소녀는 양손에 든 이쑤시개로 순대를 정신없이 찍어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아주머니의 얼굴에 푸근한 미소가 떠올랐다.

“천천히 먹어. 체할라”

“놔두게. 놔둬. 저렇게 먹는걸 보니 오져 죽겠구만. 민 서방도 잠깐만 기다리게 내가 금세 닭똥집 볶아줌세.”

명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에 놓여있는 컵에 물을 따라 소녀 앞에 놓았다. 그제서야 소녀는 먹는 걸 잠시 멈추고 명덕을 한번 바라보고는 컵에 손을 가져갔다.

곧 닭똥집이 거의 다 볶아졌는지 고소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명덕은 짐짓 입맛을 다시며 이쑤시개를 집어들더니 이내 아주머니에게 소리쳤다.

“에이, 못 참겠네. 아주머니! 여기 깡소주 한 병도 같이 갖다 줘요.!”

아주머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리며 냉장고의 소주 한 병을 따 잔과 함께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명덕은 감사합니다-하고 인사한 뒤 잔에 소주를 가득 따랐다. 그런 그를 소녀가 순대를 먹다 말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명덕은 멋쩍은 듯 살짝 웃고는 잔을 비웠다.

“넌 안 돼, 이 녀석아.”

“자, 다 됐네. 아, 그리고 민 서방. 좀 이따가 실랭이 하기 싫으니께 미리 말해두겠네만 오늘 값은 안 받을 테니 그리 알게.”

다시 한번 잔에 담긴 술을 입에 털어 넣던 명덕의 손이 툭 멈췄다. 명덕은 술잔을 내려놓고 아주머니를 바라보았다.

“에? 왜요?”

“오늘 무슨 날인지 다 아네. 케이크라도 하나 사 줄라고 했는데. 미처 준비를 못했구먼. 그러니까 오늘 값을 치르겠다고 떼쓰면 혼날 줄 알게!”

명덕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잔에 반 정도 남아있는 소주를 마저 꿀꺽 삼켰다.

“제가 왜 미쳤다고 돈을 내려 하겠습니까? 그럼 저야 좋죠 뭐. 덕분에 오늘 돈 굳었네요. 하핫.”

아 주머니는 잘 생각했네, 하며 명덕의 등을 두드렸다. 명덕은 세 번째 잔도 비우고는 닭똥집 몇 개를 소녀의 순대 접시에 옮겼다. 소녀는 기다렸다는 듯 이쑤시개를 가져갔다. 명덕 역시 들기름에 고소하게 볶아진 닭똥집을 하나 입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네 번째 잔.

찬 밤바람이 달아오른 명덕의 얼굴을 식혀주듯 불어왔다. 명덕은 차가운 공기가 기분 좋았는지 후-하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아침엔 좀 따뜻한 듯싶더니만 그의 시선이 옆에서 걷고 있는 소녀의 잠바로 향했다. 아까 사주길 잘했지. 하마터면 추위에 떨게 할 뻔했네. 자신에게 만족하며 잠바를 바라보던 명덕의 눈에 순간적으로 파란색의 베이커리 간판이 보였다. 명덕이 소녀를 돌아보았다.

“수현아. 케이크 먹고 싶어?”

소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명덕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래. 하긴 그렇게 먹었는데 더 먹었다간 배가 욕할지도 몰라. 자, 집에 거의 다 왔다. 집이 눈앞이다. 힘내자!”

명덕은 그렇게 기합을 넣고는 소녀를 번쩍 안아들어 목마를 태웠다. 소녀는 갑자기 높아져서 무서운지 팔을 허우적댔다. 명덕은 크게 웃고는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빠, 나 목마 태워줘.”

“수현아. 아빠 피곤하시잖니. 귀찮게 하지 말렴.”

“그래. 수현아. 미안하다. 웬만하면 태워주겠는데. 이 아빠가 오늘은 영 아니구나. 내일 집에 올 때는 꼭 태워줄게.”

“치잇. 나도 피곤하단 말야. 그럼 내일 꼭! 약속이다?”

“그래 약속! 자. 자. 도장까지 꾹! 됐지?”

“아냐, 아빠! 새끼손가락 걸고 해야지!”

“허허, 녀석 참. 알았다. 새끼손가락 걸고 꼭”

“그럼 약속한거다 아빠?”

“응, 이상하다? 어디 갔지?”

집으로 돌아와 보따리를 푼 명덕은 어디 칠 벗겨진 곳 없나 인형들을 이곳저곳 뜯어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수현이꺼가 없어졌네. 어디 갔지..”

명덕의 중얼거림에 소녀가 그를 돌아보았다. 명덕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소녀의 시선을 발견하고는 멋쩍게 웃었다.

“하 핫, 너 말고. 아, 내가 말 안했던가? 내 옛날에 딸 이름이 수현이었어. 말 안했나보네. 아니, 근데 도대체 어디 간 거지? 거 참 속 썩이네. 생일날에 말야. 아, 원래 오늘이 수현이 생일이거든. 에이, 헷갈리네. 그래, 옛날 수현이 생일. 음, 저번에 걔 생일날 내가 선물로 깎아준 인형 하나 있거든. 그게 없어져서 말야. 아, 수현아! 넌 생일이 언제야? 생일은 기억하지?”

소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덕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갔다. 아이들에겐 생일이 중요하긴 한가봐. 이름도 잊어버린 녀석이 생일은 용케 기억하네.

언젠데? 하는 명덕의 물음에 소녀는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잠시 이해를 못하고 멍하니 있던 명덕의 눈이 곧 휘둥그레졌다.

“오늘?”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명덕의 눈이 더욱더 커졌다.

“웃었다! 너 방금 웃은 거 맞지?”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가에 떠올랐던 미소도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명덕은 소녀를 번쩍 안아들었다.

“야! 만 하루만에 드디어 웃는구나! 거참.. 아, 오늘이 생일이랬지? 안되겠다. 너 아 아무리 배불러도 무조건 갔다 와야겠어. 기다려! 케이크 사올 테니.”

명덕은 소녀를 땅에 내려놓고는 급히 점퍼를 다시 챙겨 입었다. 그리고는 박으로 달려 나갔다. 소녀는 그런 명덕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그 자리에 드러누워 버렸다. 소녀에겐 케이크보다 잠 쪽이 약간 더 소중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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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세게 열렸다 닫혔다. 명덕은 몸을 한번 부르르 떨고는 우산을 현관에 대충 팽개쳤다.

“거 참, 낮까지만 해도 괜찮더니 왜 이리 갑자기 비가 쏟아진담. 자, 수현아. 케이크 사왔다!”

좋아라하며 달려드는 소녀를 예상하며 제법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던 명덕은 의외로 아무 반응이 없자 의아해 하며 바닥에 케이크를 내려놓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소녀는 구석에 엎어져 색색거리며 자고 있었다. 명덕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 녀석, 작년에도 이러더니. 어이, 수현아! 민수현! 일어나! 일어나서 케이크 먹어! 민수현!”

명 덕이 소리치며 소녀를 깨웠다. 잠시 몸을 뒤척뒤척하던 소녀는 이내 크게 하품하며 일어나 두 손으로 눈을 비볐다. 명덕은 소녀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케이크를 상자에서 꺼내 같이 들어있던 포크와 함께 소녀 앞으로 쓱 밀었다. 그제서야 케이크가 눈에 들어왔는지 소녀의 표정이 환해졌다. 소녀는 까르르 웃고는 포크를 집어 케이크를 크게 떴다. 막 입으로 가져가려던 소녀의 손이 갑자기 멎었다. 소녀는 잠시 주춤하더니 케이크를 가득 뜬 포크를 명덕에게 내밀었다. 명덕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됐다 됐어. 너나 많이 먹어. 우리 수현이. 이제 어른 다 됐네. 아빠도 생각할 줄 알고.”

소 녀는 배시시 웃고는 케이크를 베어 물었다. 명덕의 입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여전히 말은 전혀 하지 않지만 일 년 사이에 저렇게 자주 웃을 수 있게 된 걸 생각하면 마음 한쪽이 뿌듯해져 왔다. 소녀는 점점 그의 마음속에 딸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가슴 한 곳에 자리잡고 있던 죽은 딸에 대한 마음은 점점 엷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딸이 서운해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수현아, 아빠 좋아 보이지?”

소녀는 명덕의 혼잣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케이크를 먹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내일부턴 교회라도 나가볼까. 왠지 열심히 다닐 수 있을 것 같은걸. 명덕은 픽하고 웃으며 실없는 생각을 지워버렸다.

“그나저나 오늘 밤에는 우리 수현이 데리고 밤나들이나 갈까 했는데. 이렇게 비가 와서 힘들겠네.”

명덕이 소녀를 바라보며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자 소녀의 포크질이 뚝 멎었다.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있는 명덕의 옷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어어, 왜 그래? 나가자고? 안돼, 밖에 비 엄청 온다고. 우산 쓰고 나가도 감기 걸릴 거야.”

명덕이 고개를 저었지만 소녀는 요지부동 이었다. 점점 더 당기는 힘이 세지는 소녀의 손을 바라보던 명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일어섰다. 소녀가 환하게 웃으며 명덕의 팔에 매달렸다. 명덕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간단 소리 안 했어. 문 열어 보고. 비 좀 약해 졌으면 갈 거야.”

소녀가 쪼르르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 비는 이미 그쳐 있었다. 명덕은 작게 탄성을 지르고는 우산을 들고 소녀와 함께 집을 나섰다.

비 가 한바탕 쏟아진데다가 겨울이었지만 밖은 예상외로 따뜻했다. 명덕은 소녀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이 좀 빨랐는지 소녀는 거의 뛰다시피 하며 그를 쫓아왔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빨라지던 명덕의 걸음이 갑자기 뚝 멎었다. 소녀가 옆에서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명덕은 미안한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앞에 서 있는 건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소녀는 의문부호를 가득 담은 얼굴로 명덕을 쳐다보았다. 명덕이 앞의 건물을 손으로 가리켰다.

“자, 내일부터 너 여기 다니는 거야. 너도 유치원 다니고 싶었지? 자자, 봐. 해바라기유치원. 이쁘게 생겼지?”

소녀는 가만히 유치원 건물을 바라보았다. 명덕은 소녀를 안아 올렸다.

“내일부터. 여기서 친구들도 만나고, 노래도 배우고 하는 거야. 아, 아빠가 하나 먼저 가르쳐 줄까? 꽃밭에는 꽃들이 모여살고요, 우리들은..”

명 덕은 소녀를 어깨에 올리고 노래를 끝까지 불렀다. 소녀도 알고 있는 노래였는지 위에서 흥얼거리는 소리가 잠깐잠깐 들려왔다. 명덕은 소녀를 내려놓았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유치원을 바라보는 소녀의 모습에 죽은 딸의 모습이 겹쳐져왔다. 명덕은 머리를 흔들었다. 이제, 네가 내 딸이다. 민수현.

“아이구, 우리 수현이 노래 잘하네. 맞다. 생일선물은 이걸로 치는 거다? 괜찮지?”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명덕은 소녀의 손을 놓았다.

“자, 이제 집에 가자. 민수현! 집까지 앞장서봐!”

수 현은 기분이 좋아진 듯 뛰는 듯이 앞장서서 걷지 시작했다. 명덕은 시소를 지으며 소녀의 뒤를 따랐다. 소녀의 걸음은 가벼웠다. 명덕은 걸음을 조금 늦추었다. 이렇게 뒤에서 즐거워하는 소녀의 모습을 보며 천천히 걷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그가 살짝 뒤쳐진 것을 모르는지 앞장서 달려가던 소녀가 갑자기 멈추었다. 그리고 뒤로 돌아 명덕에게 손짓했다. 명덕은 웃으며 발걸음을 빨리 했다. 소녀는 자신에게 빠르게 걸어오는 명덕을 봤는지 다시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침 횡단보도의 불이 파란색으로 바뀐 상태였다. 그 순간이었다. 명덕의 눈에 오른 쪽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두 개의 불빛이 들어왔다. 명덕의 시야가 좁아졌다. 앞서 걷고 있는 소녀만이 눈에 들어온다.

“수현아!!”

소녀가 다시 멈춰 서서 그를 바라본다. 그는 이미 소녀를 향해 달리고 있다.

소녀가 그를 바라본다. 그는 몸의 모든 힘을 짜내 소녀를 향해 달려간다.

조금만 더 빨리 달릴 수 있다면.

소녀가 그를 바라본다.

조금만 더 빨리 저곳에 도착할 수 있다면

소녀는 말없이 그를 바라본다.

조금만. 조금만 더 빨리 달릴 수 있다면.

그는 몸을 날린다.

그의 손이 소녀에게 닿는다.

소녀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그는 있는 힘껏 소녀를 밀친다.

빠아앙-!

조금만, 조금만 더 빨리 달릴 수 있었다면

그때도, 조금만 더 빨리 달릴 수 있었다면

온 몸에 둔탁한 충격이 전해진다.

시야가 붉게 물들어 간다.

시야가 하얗게 변해간다.

어디선가 아빠, 아빠, 하고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아빠! 아빠!

누굴까, 수현일까. 아니면 수현일까.

명덕의 입에 미소가 걸린다. 뭐야, 이 녀석, 말 할 수 있었잖아...

수현아, 아빠 잘했지? 아빠.. 이번에는 빨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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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하얀색벽, 하얀색 침대, 하얀색 이불, 하얀색 의자.

침대 위에는 한 남자가 조용히 누워있다.

침대 옆에는 교복을 입은 소녀 여러명이 서 있다.

의자 위에는 나이 지긋해 뵈는 아주머니 한명이 앉아있다.

남자는 손에 무언가를 꼭 쥐고 있다. 소녀 중 한명은 남자의 쥔 손을 꼭 잡고있다.

아주머니는 손수건을 들어 눈물을 찍어낸다.

“도대체 이 양반은 뭔 술이 그렇게 취해가지고... 내일이 딸 생일이라고 달라는대로 줬더니...”

눈물을 미처 다 닦지 못했는지 하얀 바닥에 똑, 하고 한방울이 떨어진다.

“아니, 또 길바닥에서 잘라면 곱게 자지, 뭔 바람이 불어가지고 갑자기 자기 점퍼는 가로등 밑에다가 그렇게 얌전하게 벗어놨당가? 어젯밤같이 추운 날씨에...”

병실은 조용하다. 아주머니의 흐느낌소리만, 조용한 병실에 낮게 깔린다.

조용한 병실에, 갑자기 소녀의 고함소리가 크게 울려퍼진다.

“와봐요!! 아저씨, 아저씨 웃었어!! 아저씨 일어나는거 맞죠? 아저씨 안죽는거죠?”

병실이 웅성댄다. 그리고.

띠-

다시금, 완전히 조용해진다.

“운명하셨습니다.”

의사의 낮은 목소리. 그리고, 아주머니의 통곡을 시작으로 갑자기 병실이 소란스러워진다.

그리고, 꼭 쥐고 있던 명덕의 손이 사르르 펴진다.

툭.

인형 하나가 병실 바닥으로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인형은 데굴데굴 굴러가 벽에 부딪히고 멈춘다.

소녀 한명이 울다 말고 인형을 집어든다.

인형의 발에 조그맣게 새겨져있는 글자가 소녀의 눈에 들어온다.

-9.7. 수현이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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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덕은 눈을 떴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본다. 주위가 온통 하얗다. 여기가 어딘가, 하고 사방을 살펴보던 명덕의 눈에 하얀 옷을 입고 있는 소녀가 들어온다. 명덕은 반가운 마음에 소리쳐 소녀를 부른다. 소녀가 그를 바라보았다니 그에게로 달려든다. 명덕이 소녀를 안아든다. 소녀가 까르르 웃는다. 명덕은 소녀를 내려놓는다. 소녀가 명덕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민다. 명덕은 소녀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고 엄지 도장을 찍는다. 명덕은 수현을 안아든다. 수현을 목마 태운다. 수현이 자지러지듯 마구 웃는다. 명덕도 따라 웃는다.

수현이다. 수현이다. 수현이다. 수현이 아빠에게 인형을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