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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의 사진 ]
나는 달동네를 텔레비전에서만 봤지, 이렇게 높은 곳까지 집이 있을 줄 몰랐다. 차로 한참을 올라갔는데, 길이 좁아, 걸어서 20분을 더 올라가야 했다. 다닥다닥 붙은 집은 어디가 창문이고 어디가 문인지 구분이 안 됐다. 반쯤 썩은 나무판자로 문을 만들고, 바람을 막기 위해 신문지를 차곡차곡 바른 모양새가 사람 사는 집 같지 않았다.
나는 손에 목장갑을 끼고 연탄을 날랐다. 연탄은 생각보다 무거워서 운동 한 번 안 한 나로서는 힘에 겨웠다. 교회 청년회가 주관하는 ‘사랑의 연탄 나눔 행사.’ 지게가 들어가기 힘든 좁은 골목을 지나 독거노인에게 연탄을 나눠주는 행사다. 오늘은 열두 군데를 돌아야 했다. 긴 생머리는 거추장스러워 이미 질끈 묶었다.
연탄만 날라주면 금방 끝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혼자 사는 어르신의 말벗도 되어 드리고, 자질구레한 일도 도와드려야 했다. 그래서 적은 집을 방문해도 시간이 꽤 걸렸다. 나도 그런 이유로 김 할머니 방에 앉아 있었다.
원래는 오래된 전구를 갈고, 먼지가 쌓인 겨울 이불을 털어드리고 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잠깐 앉아 보라시곤 서랍을 뒤적였다. 나는 할머니의 잿빛으로 변한 머리색으로 나이를 가늠했다. 입은 옷은 군데군데 솔기가 터져 솜이 빠져나왔다.
[아, 여기 있네.]
할머니가 내 앞에 보물처럼 내려놓은 것은 앨범이었다. 할머니는 이제는 뼈 밖에 안 남은 쭈글쭈글한 손으로 앨범을 펼쳤다. 젊은 남녀의 사진이 몇 장. 그리고 아이를 안은 부부의 사진이 몇 장. 모두 노랗게 색이 바랬다.
[우리 남편이우.]
할머니는 남녀사진 중, 키가 크고 눈썹이 짙은 남자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그 때까지 할머니의 요구가 뭘까? 추측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더 걸릴까? 내심 걱정됐다.
[내가 남편 자랑 좀 하려고 그려.]
할머니는 마음을 읽는 것 같은 차분한 눈으로 나를 봤다. 뜨끔했다. 할머니는 심하게 성긴 머리카락을 넘기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한없이 행복한 미소로 사진을 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 남편이 얼마나 멋진 사람인 줄 알우?]
할머니는 앨범의 사진을 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젊은 시절 연애 이야기부터, 결혼까지. 처음에는 시큰둥하게 듣던 이야기에서 온기를 느꼈다. 차가운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골방마저 훈훈하게 하는 온기. 할머니가 얼마나 사랑받았는지, 남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짦은 시간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지만 알 수 있었다. 나라도 그런 사랑을 받았다면, 저렇게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을 테지.
[그런데 이 양반이 같이 가기로 하고, 먼저 갔어 그래.]
할머니가 눈시울을 붉혔다. 바짝 마른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할머니는 앨범에서 사진을 꺼내더니 내게 건넸다.
[내가……. 잘 때마다 그 양반 생각이 나서 잠을 못 자겄어.]
[할머니 그럼 제가 뭘 도와드릴까요?]
할머니는 사진이 아주 귀한 보물인 것처럼 조심스레 내 손바닥 위에 놓았다.
[액자 같은 데 넣어주. 머리맡에 두고 자면 좀 나을 것 같어.]
[그럴게요. 할머니, 그럴게요.]
나는 사진을 받고서도 금방 일어나지 못 했다. 갑자기 작고 좁은 방에 홀로 남을 할머니가 너무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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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평생을 함께 하기로 한 남편, 정말 서로를 아끼는 부부. 이들이 헤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도 다시 볼 수 없는 죽음으로 이별한다면. 아직 어린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짧은 시간 만났을 뿐이지만, 진실 된 사랑이 부러웠고, 홀로 남은 할머니가 안타까웠다. 그래서 오래된 사진을 작은 탁상액자에 넣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짧은 순간 받은 감명은 그것이 찾아온 시간만큼이나 금방 사라졌다. 혼자 찾아가는 것보단, 다음 청년회 행사 때 함께 가면 되겠지. 그렇게 안이한 마음을 먹었다. 할머니의 마음을 더 이해했다면, 그리고 내가 볼 광경을 떠올렸다면, 난 다음날 당장에라도 할머니를 찾아갔을 것이다.
달동네는 다닥다닥 붙은 집만큼이나 공간도 협소해서, 겨울 연탄을 2주에 한 번 가져다 주어야했다. 나는 2주면 그리 길지 않다고 여겼다. 실제로도 내게 2주는 금방이었다.
그 사이, 큰 눈이 내렸다. 2주 만에 찾은 달동네는 하얗게 변했다. 나는 좁은 눈길을 통과하며 열의가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탁상액자를 보고 좋아할 할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니 죄책감이 사라졌다. 그리고 우쭐함이 들었다. 시린 바람도, 미끄럽고 가파른 길도 참아낼 수 있었다.
할머니의 집에 도착했다. 노크를 하고 ‘할머니, 저 왔어요.’ 외쳤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달동네 화장실은 공용이기 때문에 멀리 나가야 했다. 할머니가 화장실에 간 것이라 생각하고 기다렸다.
나는 액자에 들어간 사진을 보았다. 노랗게 변한 사진 속의 두 남녀. 그들은 사진 찍는 것이 처음인지 시선이 어색했다. 하지만 손만은 꼭 잡은 채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한참이 지나도 할머니는 오지 않았다. 어디 가셨나? 나는 문을 살짝 당겨보았다. 잠겨있지 않은 문은 쉽게 열렸다. 어라. 나는 찬바람을 피할 요량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할머니는 곤히 잠들어 계셨다. 아니, 내가 할머니의 사연을 몰랐다면, 액자를 만들지 않았다면, 두 남녀의 추억을 몰랐다면, 그렇게 생각하고 할머니를 깨우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무릎을 꿇고 입을 막아야 했다. 할머니의 모습을 보자마자, 단번에 상황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후회와 슬픔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할머니는 이불 속에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성긴 머리가 곱게 빗겨 있었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나는 액자를 꼭 쥐고 할머니 곁으로 갔다. 할머니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할머니의 볼을 쓸었지만, 싸늘한 느낌에 금방 손을 뗐다. 나는 액자를 할머니 머리맡에 두고 천천히 일어섰다.
눈물을 닦으며 나는 골목길을 내려왔다. 목사님을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했다. 나의 죄책감을 설명해야 했다. 하지만 도저히 똑바로 생각 할 수가 없었다. 차가운 이불 속에 누운 할머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행복한, 오랜만에 연인을 만난다는 기대에 찬 미소를 지은 채, 영원히 잠든 할머니의 모습이.
사진 속의 젊은 부부와 꼭 닮은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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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생활이 102일 남았네요.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24 00: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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