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꽃>>
























제 1막 - 못이 없어 편자를 잃었네


청월

「푸른빛을 내는 달. 21～25일. 자연의 모든 생물들이 생동하는 때. 청월기의 밤에는 희귀한 생물들이 본능에 따라 달빛을 받으러 밖으로 나온다. 날씨는 매우 맑고 깨끗하며 몸에 병이 있는 사람은 달빛을 받는 것만으로도 상태가 호전된다. 」


“ 해28 다섯말을 모래30알 동안 종22. ”

  연금술 강의실은 안전을 위해 다른 강의실과 떨어진 본관 꼭대기 층에 있다. 천장에는 4대의 거대한 환풍기가 돌아가고 있고 사방은 비상문을 제외하고는 창문하나 없는 철벽으로 둘러져 있다. 2학년 학생들의 강의가 있는 지금, 4열로 배치된 튼튼한 강의실 탁자 위에는 각종 실험대가 즐비하며 이름 모를 풀들이 바구니마다 놓여있고 묘한 색깔의 액체가 담긴 플라스크와 약초를 갈아놓은 사발들은 학생들의 손길사이로 바쁘게 오고간다.

방금 단상 위에서 수십 명의 학생들을 향해 소리쳤던 남학생이 다시 외쳤다.

“꿈풀 5개 30분동안 300ml비커에 두 번 섞기!”

연금술용 음어(音語, 용어를 임의의 다른 단어로 바꿔 말해 내용의 보안을 유지하는 방법)를 윔의 표준어로 해석해서 또박또박 말하는 남학생의 음성에는 왠지 모를 거만함이 묻어있다.

실험에 몰두해 있던 휘미는 단상위의 남학생을 노려보며 말했다.
“ 저 빌어먹을 놈 누가 못 알아들었다나? ”
“ 흥분하지 마! 넘친다. ”
맞은편에서 휘미와 같은 조를 이루어 실험을 하고 있던 메지가 놀라 말했다. 휘미는 날카로운 얼굴선과 긴 눈매 때문에 날카로운 인상인 반면 메지는 전반적으로 동글동글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어 한눈에 보기에도 순박하고 선한 얼굴이다.
“ 빨리 끝내자. 저 녀석 거만 떠는 꼬락서니 보는것도 지겨워. ”
휘미는 그렇게 말하고선 다시 분주하게 실험기구들을 움직였다. 여러 플라스크를 한꺼번에 손가락 마디마디에 낀 다음 이리저리 붓고 흔드는데 그 과정이 너무 거칠어 깨뜨려 버릴 것 같았다. 메지는 휘미가 섞어서 넘긴 용액의 양을 침착하게 잰 뒤 펜으로 간단한 공식을 써 본 뒤 조금씩 섞어서 큰 비커에다가 옮겨 담았다. 둘은 손발이 잘 맞는 것으로 보아 꽤 오랫동안 같은 조로 호흡을 맞춘것 같았다. 마지막 플라스크까지 넘겨준 휘미가 말했다.
“ 이게 마지막이지? ”
“ 응. 이거 봐. ”
메지는 비커를 높이 들어 보았다. 그가 비커를 좌우로 흔들수록 점점 용액들이 혼합되어가면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용액이 완전히 혼합되자 비커의 눈부신 빛이 강의실 벽에 반사되어 번쩍거렸다.

“진짜 밝다! ”

휘미와 메지가 제일 먼저 실험을 완료하자 학생들 모두가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멀리 창가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신문을 훑어보던 난논 교수가 그들을 불렀다.
“ 꽤 일찍 끝냈는데? ”
교수는 비커를 흔들어 보이더니 만족한 얼굴로 평가지를 작성하였다.
“ 청단월 뜰 날도 얼마 안 남았잖아요. 열심히 해야죠. ”
휘미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난논 교수는 기껏해야 3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작은 키에 턱이 접힐 정도의 살집이 후덕해 보이는 그는 학자복에 잘 어울리는 짧은 금발머리를 말끔히 넘기고 있었다. 지적인 느낌이 들면서도 상대방에게 편안한 인상을 주는 스타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다른 교수들과는 달리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재미있는 탓에 학생들이 매우 잘 따랐다.
반장인 아나들은 플라스크를 제출하고 들어가는 두 학생을 여전히 거만한 웃음을 띠고 바라보았다. 그는 키도 훤칠하고 외모도 깔끔한 편이지만 남을 무시하는 듯한 말투와 이야기 끝에 붙는 자기자랑 때문에 패거리를 빼고는 그와 어울리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집안이 큰 권력과 부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를 대놓고 무시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이것은 아나들을 더욱 착각 속으로 빠지게 만드는 것 중 하나였다.
사실 휘미나 메지가 아나들을 결정적으로 싫어하게 된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다.

수업이 끝나자 여지없이 또 쥬디하의 앞으로 가서 얼굴을 들이미는 아나들에게 두 학생은 참을 수 없을정도로 이가 갈렸다. 아나들은 쥬디하 곁에 바짝 붙어 걸으며 말했다.
“ 어이. ‘냉염한’ 쥬디하. 실험 어땠어? ”
쥬디하는 웃으면서도 얼른 거리를 벌리면서 말했다.
“ 좋았지! 아나들 덕분이야. ”
쥬디하가 조금이라도 똑부러진 성격이 아니었더라면 아나들의 꾐에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쥬디하는 아나들의 능글맞은 인사에는 쾌활하게 대응하면서도 절대로 그 이상 그와 친분을 두지 않았다. 누가 지은 별명인지는 모르지만 학생들이 쥬디하를 일컬을때 칭하는‘냉염한’ 라는 타이틀은 그녀와 정말 잘 어울렸다. 그리고 그것은 휘미와 메지가 쥬디하를 더욱더 좋아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했다.

연금술 수업이 끝난 휘미와 메지는 세계사 강의실로 들어갔다. 세계사 수업은 항상 즐거웠다. 60세는 족히 넘어 보이는 루히조 교수는 겉으로 풍기는 분위기는 엄숙해 보이지만 실제 수업시간에는 다정하고 재미있었다. 목 소매에 세로로 주름이 접힌 검은색 수트를 즐겨 입는 그는 학문적인 내용을 강론하기 보다는 학생들에게 역사에 얽힌 신비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이야기를 할 때 항상 목소리를 중저음으로 깔고 노래하듯 강약을 조절해가며 말했다. 멍하니 그의 이야기에 빠져있다보면 학생들은 모두 현장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옛날 세계의 대괴는 하늘해협을 중심으로 날라져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시대는 다들 알다시피 태초의 그림자에 가려진 영역이라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알기 힘듭니다. 다만 보란 에라니스가 쓴 ‘모래기록’의 첫 장에 짧게나마 그때의 설명이 쓰여 있지요. ”

「어느날 동쪽해 너머로부터 ‘대 집행자’가 아케아대륙에 들어오면서 이곳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대 집행자와 그의 무리는 토착민족들에게 발달된 언어와 문화를 전달해 주었고 각각의 대륙의 균열에 바닷물을 채워 서로를 연결시켰다. 이것이 ‘대 홍수’ 이다.」

“ 모래기록에는 대 홍수에 대해 이렇게 간단하게 기술되어 있지만 지금부터 제가 들려줄 이야기는 그 안에 얽힌 자세한 이야기랍니다. 대 집행자가 어떤 방법으로 깊은 균열을 바다로 매꿨는지에 대한 내용인 ‘홍수설화’가 바로 그것이지요. ”

홍수설화

적월의 첫째날 하늘을 향해 그의 천둥지팡이를 들자 세상의 모든 구름이 모여들었고
적월의 둘째날 지팡이로 땅을 세 번 치자 세상이 울리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며
적월의 셋째날 그가 만든 거대한 방주인 ‘세상의 배’에 아케아두르의 모든 사람들을 태우자 빗물이 균열을 매꾸어 바다가 탄생하였도다.

대 집행자가 그의 동료들과 함께 동해를 넘어 처음 아케아에 도착하였을 때 대괴들은 1km가 넘는 커다란 균열로 날라져 있었다. 균열 밑으로는 끝없는 허공만이 가득했고 밑으로 아득하게나마 물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모험심이 깊은 토착민들이 간혹 길다란 밧줄을 엮은 사다리를 연결해 대괴를 이동 하곤 하였으나 매우 위험한데다가 물건들을 같이 옮기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불편했다.
대 집행자는 아직 미개하지만 아름답고 순수한 이 세계가 좋았다. 그는 아케아를 멋지게 만들기 위해서는 대괴들을 물로 연결시키는 것이 가장 우선이라고 생각하여 일곱별이 뜬 밤, 앗사나 고원의 정상에서 지혜로운 달의 신, 고양이 루나인을 만난다.
“ 스티리쏘가 가지고 있는 천둥지팡이를 사용한다면 그런 일은 쉬울거에요. ”
하지만, 성질이 급하고 괴팍한 천둥과 구름의 신 스티리쏘에게 그런 귀찮은 일을 부탁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밤낮으로 고민에 잠겨있던 대집행자는 그도 모르게 잠이 들어 꿈을 꾸게 되고 꿈과 사랑의 여신 우미네데가 우연히 그를 보게 된다.
“ 그대는 어찌해서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가? ”
대집행자는 꿈속에서 거짓말을 했다.
“ 그대의 꿈에서 분명 신들의 모습을 보았는데 왜 거짓말을 하는가. ”
우미네데는 그를 꾸짖었고 그제서야 대집행자는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우미네데는 그의 열정을 높이 사 그를 도와주기로 한다.
“ 앞으로 이 바구니 안에 담기는 모든 것은 스티리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이 안에 그가 원할 만한 모든 물건을 담아다가 바쳐라. 그러면 저절로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라. ”
꿈에서 깨어난 대집행자의 팔에는 크고 둥근 대나무바구니가 안겨 있었다. 그는 잠에서 깨자마자 신이 좋아할 만한 세상의 모든 귀중한 물건들을 모아 그의 부하들을 이끌고 스티리쏘를 향해 스니게치 산맥으로 향했다. 천둥과 벼락이 대집행자 일행을 가로막고 홍수와 해일이 그를 덮쳤지만 대집행자는 끝끝내 정상에서 스티리쏘를 만나는데 성공한다.“ 나를 만나고자 하는 용기가 가상하다. 분명 어떤 특별한 용건이 있어서 날 보려고 한 것이겠지. ”
스티리쏘는 번개 왕좌에 앉아 그의 탐스러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대집행자는 왕좌에서 나오는 눈이 멀 정도로 환한 빛에 고개를 땅으로 푹 숙이고는 바구니 안에 담긴 수많은 진귀한 물건들을 얼른 그의 앞에 뻗었다.
“ 아니, 이런것들은 내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내키는 대로 차지할 수 있는 것들이지. 인간이여! 나는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대단한 것을 원한다. ”
대집행자는 얼른 물건의 종류를 바꿔 바구니를 그에게 뻗었지만 스티리쏘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대집행자는 더 이상 놓을 물건이 없어지자 그의 방대한 계획이 거품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에 슬픔이 몰아쳐왔다. 그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너무 큰 슬픔에 그의 눈물은 빛나며 떨어졌고 그것은 서리와 눈물의 여신인 사메시아의 눈에까지 단번에 들어갔다. 사메시아는 그 깊은 서러움의 근원에 대해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고 그의 눈물이 있는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집행자의 눈물이 바구니에 떨어지자 스티리쏘가 짐짓 놀라더니 큰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 이제야 대단히 만족스럽구나. 사메시아를 가둬 바치다니. 나는 오래전부터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다. 그런데 네가 이런 지혜로 그녀를 나에게 바칠 줄이야. ”
대집행자의 눈물이 바구니에 떨어지면서 눈물 안에 둘어가있던 사메시아가 스티리쏘에게 바쳐진 것이었다.
스티리쏘는 그의 구름지팡이를 마음껏 쓸 수 있게 빌려주었고 대집행자의 눈물안에 있던 사메시아는 바구니의 영력에 의해 스티리쏘와 영원히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아케아의 균열에는 물이 가득차게 되었고 그 후로 사메시아가 다스리는 곳 - 눈이 내리거나 서리가 낀 곳에는 절대 비가오거나 천둥이 치는일이 없다고 한다.

“ 휘미! 메지! ”
멍하니 루히조 교수의 이야기에 빠져있던 두 학생의 틈으로 커다랗고 우락부락한 얼굴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나스치였다. 메지는 한번 집중하면 주변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계속 신화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지 반응이 없다가 나스치가 그의 의자 등받이를 걷어차자 화들짝 놀라 말했다.
“ 어, 뭐야, 나스치? ”
나스치는 얼굴을 빼고 몸을 한참 꼼지락거리더니 그들 바로 뒤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두 학생의 귀에다가 대고 크게 말했다.
“ 늦게왔다. 어떻게 된 거야? 저 엉뚱한 할아범이 또 무슨 소설을 짓는 거지? ”
휘미는 나스치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얼른 화제를 돌렸다.
“ 조용!… 근데 체루디는? ”
“ 안 왔어. 다이지 밖에 나갔어. ”
나스치의 말에 둘은 동시에 고개를 돌아봤다. “ 뭐?” 나스치는 예상 했다는 듯 설명해주었다.
“ 내일 아침에 천문학 시험이래. 어디 갔겠어. ”
메지가 노골적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 술집에 공부하러 갔겠네. 설마 또 데리러오래? ”
휘미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 저번에 무슨 공연보고 싶다더니 결국 갔군. ”
“ 어디서 하는데? ”
메지의 물음에 나스치가 대답했다.
“ 다이지 서쪽으로 내려와서 반대편 거리, 계속 올라가다보면 두번째로 있는 술집. ”
휘미가 이마에 손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 미치겠네. ”

  이곳 다이지는 대륙 최고의 학문기관이다. 세계에서 가장 앞선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가장 큰 도서관과 가장 훌륭한 학자들이 공부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 각 지의 뛰어난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학문을 배우고 있다. 아주 오래전 베라린 피스너라는 한 학자가 윔의 집행정 서쪽 언덕에 50층짜리 탑을 세운 것이 다이지의 시작이었다. 그 후로 별관과 회의관, 강당, 신도서관 등이 후손들에 의해 지어졌다. 다이지의 본관은 피스너가 세운 건물임에 걸맞게 그 구조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과학적으로 짜여 있다. 납작한 반달 모양의 탑 형태로 쌓여진 본관은 외벽이 햇빛이 비출 때는 거무스름한 기운으로 빛나며 밤이 되어 달빛을 받으면 청색 빛으로 빛난다.
탑의 안은 굉장히 복잡한 구조로 되어있어서 길을 전혀 모르는 자가 안에 들어올 경우 미궁처럼 갇혀 평생 빠져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건물을 전체적으로 놓고 보면 복잡하지만 규칙이 있는 듯 보인다. 모든 층의 중앙에는 탑을 쉽게 오르내릴 수 있게 물의 낙차를 이용한 승강기를 만들어 놓았으며 그 승강기를 중심으로 회랑처럼 수많은 강의실과 연구실 등이 미로 곳곳에 분포되어 있다.

“ 하. 역시 멋있군 멋있어. ”
석양이 막 지기 시작한 그요네 산 밑으로 펼쳐진 다이지의 풍경은 쾌활한 나스치 까지도 감성적으로 만드는 모양이었다. 휘미도 키가 작진 않았지만 나스치는 훨씬 덩치가 좋았고 몸도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질이었다. 처음에는 가장 영리한 청년들만이 들어올 수 있다는 다이지에 어떻게 나스치 같은 무뢰한이 들어 올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다들 궁금해 했었다. 그의 옛날이야기를 하자면, 어머니는 일찌감치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그 후로 야금사업에 뛰어들어서 하루 종일 공장에서 일을 해야 했다. 돌봐주는 사람이 없던 탓에 그는 어릴 적부터 나쁜 짓만 하고 다녔고 반항적인 성격이 되어 싸움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머리가 유달리 좋은 탓에 나스치의 재능을 발견한 한 스승의 끈질긴 지도로 그는 훌륭하게 변해서 다이지 까지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옛날 성격을 깨끗이 고쳤다고는 하지만 가끔 강약이 조절이 안되는 성격이나 거친 말투를 보면 아직 예전 모습은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다이지 서문을 빠져나간 뒤 언덕을 내려가 시가지로 들어오자마자 순찰중인 폴리스 두 명이 세 학생의 길을 막았다. 휘미가 먼저 다이지 2학년 학생들의 상징인 팔찌를 보여줬다. 그리고는 그냥 지나가려고 하자 제차 앞길을 다시 가로막았다.
“ 미안한데 위조된 신분증일 수도 있으니 잠시 동행을 해야겠소. ”
“ 다이지의 팔찌는 아무도 위조하지 못하는 물건인데요. ”
휘미와 나스치가 따지듯이 말했다. 하지만 폴리스들은 고개를 갸우뚱 할 뿐이었다. 메지는 혼자 딴생각을 하고 있다가 멀리 학자복 차림의 한 남자를 발견하고는 그냥 그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 난논 교수님! ”
휘미와 나스치도 허둥지둥 그를 따라 교수에게 갔다. 퇴근길이던 난논 교수는 어리둥절하면서도 반갑게 맞이했다.
“ 교수님! 지금 하고 계신다던 새로운 실험은 잘 되어가세요? ”
교수가 웃으며 말했다.
“ 물론이지. 다른 교수들 몰래 하는 거라 맘 놓고 실험을 못하고 있어서 문제지만. ”
“ 저번엔 인공 눈을 만든다고 하셨잖아요. ”
“ 그건 이미 성공했지. ”
교수와 일행이 친근하게 대화하자 폴리스들도 슬금슬금 자리를 떠났다. 폴리스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나자 교수가 눈치를 주었다. 세 학생은 주변을 둘러보고선 한숨을 쉬었다.
“ 평소에는 이거면 되었잖아? ”
메지가 팔찌를 들며 물었다.
“ 나스치의 얼굴을 보고 수상하다고 생각한 걸까. ”
휘미가 중얼거렸다. 메지는 물론 나스치 본인도 신빙성 있어 하는 얼굴이었다. 난논 교수가 이들의 어깨에 손을 얹더니 말했다.
“ 치안이 안 좋아져서 그래. 요즘 모르니? 사핀이 윔이 연결되는 남쪽으로 군용가도를 계속 지어나가고 있다던데. ”
메지가 눈을 크게뜨며 물었다.
“ 가도? 그런거 하나로 이 커다란 수도의 치안이 영향을 받을 정도인가요? ”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연금술하고 똑같지 뭐. 비커 1mg 만큼의 용액이 들어가느냐 마냐에 따라서도 실험 전체의 결과에는 큰 영향을 줄 수도 있는 법. 그리고 지금 소문이 안나서 그렇지 북쪽 상황은 우리가 알고 있는것 보다 더 안 좋을지도 몰라. ”
“ 그나저나 새로운 실험은 어떤 거에요? ”
휘미가 묻자 난논은 손바닥을 비비며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 정말 엄청난 거지. 후! 재료가 안구해져서 문제긴 하지만. ”
“ 보여주시면 안돼요? ”
“ 안 돼. ”

교수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청월(靑月)의 마지막 날의 위머는 생명체처럼 활기에 넘쳤다. 기름을 태워서 빛을 내는 가로등인 등룡이 도시를 가득 채웠고 상점가 쪽에도 대낮처럼 불이 환하게 번져 나왔다. 커다란 대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걸어 다니고 이곳저곳에서 시끌벅적한 웃음 소리와 음악소리, 불에 무언가를 굽는 냄새 등이 어우러져 전형적인 위머의 밤거리 풍경을 만들어내었다.
“ 나온 김에 뭐 하나만 사갈까. ”
둘이 동시에 돌아보자 메지는 머쓱해져서 다시 말했다.
“ 손목시계 말이야. ”
“ 시계?. 학교에 많이 달려있잖아. ”
휘미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메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긴 한데. 태엽시계는 아주 정확하단 말이지. 분해를 해봐야 겠어. ”
“ 또 그거에 빠져서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하려는거 아니야? 저번에는 한달동안 자물쇠만 가지고 놀았잖아. ”
“ 재밌는걸 어떡해. ”
그러자 나스치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 아 그래? 가자고. 마침 잘됐다. ”
나스치가 신이나서 앞장섰고 아직 기숙사로 복귀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휘미는 더 이상 반대 없이 주변의 잡화 상가로 향했다.
“ 이것봐 다음 주 묵월(墨月)기 천공활자 신간이야. ”
휘미는 길거리 가판에 걸려있던 신문 하나를 뽑아 들었다. 신문에는 위머에서 있었던 일들부터 시작해서 아직 잘 개발이 되지 않은 윔의 동부 지역 소식까지도 실려 있었다. 가나씨 코퍼레이션에서 새로 만든 복잡한 기계 발명품에 대한 광고들도 큼직하게 군데군데 실려 있는것을 본 메지도 당장 한부를 구입했다. 무심코 신문을 넘기던 휘미의 눈에 ‘사핀의 근황과 윔과의 관계 ’라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아까 난논교수와의 대화가 생각난 휘미는 무의식적으로 신문을 구입했다.
나스치는 금세 어디서 가죽으로 만든 공을 하나 사가지고 오고서는 좋아서 펄쩍펄쩍 뛰어나녔다.
일행은 골목 구석의 작은 시계방에 다다랐다. 건물은 입구에서부터 낡고 퀘퀘한 냄새가 났으며 가로등도 비치지 않아 들기름을 붙고 갈대심지를 꼬와 만든 등불을 나무 홈에 매달아 간판을 희미하게 밝혀 놓고 있었다.
“ 쳇, 역시나 전부다 가나씨 코퍼레이션에서 들여온 것들이네. ”
회전식 문을 열고 시계방에 들어온 나스치가 제일 먼저 꺼낸 말이었다.
“ 뭐 어때. 우리가 쓰는 게 대부분 이놈들 꺼잖아.. ”
메지는 들어오자마자 손목시계에 눈이 팔린 채로 대답했다.
나스치는 시계방의 모든 시계를 다 뒤집어 가나씨의 상표를 확인하더니 치마를 두른 여자 다리모양의 추가 흔들리는 벽시계에 눈을 고정시켰다. 메지는 시계상점 주인의 설명에 몰두해 있었고 시계에 관심이 없는 휘미는 구석에 쌓아둔 장작 위에 앉아서 아까 산 신문을 펴들었다.

「사핀은 북쪽 설원의 가로소 야만인들과의 경계에 관한 협상을 성공적으로 끝낸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이제 관심을 남쪽으로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사핀군이 남쪽지방으로 가도를 이어나가고 있다는 특파원들의 첩보가 있었으며 최근에 사핀 남쪽 헤논바 항에 대규모 철강 기술자들을 동원했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봐서 조만간 윔도 사핀에게 무언가 압력의 메시지를 넣을 것이라는 공공연한 소문이 나오고 있다. 분위기가 악화되어 가는 가운데 본사는 미지의 국가이던 사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기자 여럿을 파견한 상황이며 사핀의 한 도시의 …」
“ 이거 어때! ”
휘미가 글을 절반쯤 읽었을 때 메지가 왼손을 뻗어 우리에게 들어보였다. 도금이 된 납작하고 작은 원형모양의 태엽시계가 불빛에 반사되어 빛났다.

시계방에서 나온 이들은 그요네 산 쪽으로 뻗어있는 위머의 중앙대로에서 군사학교 무쇼냐쇼즈 쪽으로 나 있는 새 길로 방향을 바꿨다. 생긴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듯한 새 거리로 들어서자 번화한 상점가들이 줄을 이었고 앞서 걷던 나스치는 체루디가 있다는 술집을 발견하고 휘미 일행에게 손짓했다.
체루디가 있는 술집은 [단월의 밤] 이라는 흔한 이름이었다. 술집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터가 크고 깔끔했다. 내부는 모서리에서 반대편 천장까지 대각선으로 X자모양의 기둥살을 여럿 박아 2층으로 개량한 형태로 되어 있었다. 이제 슬슬 과객들이나 외출 나온 사람들이 한자리씩 자리잡고 앉을 시간이라서 사람 수는 많았지만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 이녀석 어디 앉아있으려나 ”
나스치가 발돋움을 하여 두리번거렸다. 휘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 조그매서 잘 안보여. 카운터에다가 물어볼까. ”
“ 누가 안내했을지 알고. ”
일행은 1층을 전부 훑어본 뒤 2층에 올라가서 찾아보기 시작했다. 간혹 혼자서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은 사람도 있었지만 체루디는 아니었다.
눈썰미가 있는 휘미가 커다란 나무술통이 잔뜩 쌓여있는 맨 구석 테이블을 가리켰다. 커다란 모자를 눌러쓴 사람이 혼자서 중얼거리며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나스치가 살며시 다가가서 얼굴을 들여다보려고 몸을 낮추었다.
“ 야! ”
그자가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서 몸을 들이미는 바람에 나스치는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휘미가 그를 알아보고 외쳤다.
“ 체루디! ”
“ 다들 늦었네요? 어서와. ”
그제야 체루디는 일행을 향해 환하게 웃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버렸다. 모자를 벗자 머리를 두 갈래로 딴 조그맣고 귀여운 여자얼굴이 나타났다. 나스치가 몸을 털고 일어나 옆에 앉으며 말했다.
“ 모자는 왜 쓰고 있는 거야. ”
체루디가 대답했다.
“ 치근대는 놈들이 있다니깐. ”
“ 웃기네. ”
휘미가 입을 내밀며 중얼거렸다. 그는 체루디의 앙증맞은 주먹질을 그녀의 큰 모자로 막다가 결국 테이블 밑의 발길질에 무릎을 채였다.
체루디의 자리 앞 에는 벌써 빈 잔이 세잔이나 놓여있었다. 놀란 휘미는 체루디의 눈빛을 깨끗이 무시하고 맥주를 세잔만 시켰다.

나이도 두살 어린 그녀가 이 세 남자들이랑 잘 어울리는 것은 사실 그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 남자들 모두 무언가 특이한 면은 가지고 있지만 체루디에 비하면 평범한 축에 속하였다. 지금상황만 봐도 그랬다. 그녀는 시험전날이면 항상 시끄러운 술집에 와서 공부하는 설명하기 힘든 버릇이 있다.
“ 집중이 잘되니까 그렇지. 선배도 일단 한번 해봐. ”
나스치는 포기한 듯 벽장의 장식을 건들거리며 훑어보다가 체루디가 발을 밟자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는 체루디에게 만큼은 꼼짝 못했다. 체루디가 기가 센 것 때문이라고만 하기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기 때문에 휘미와 메지는 나스치가 그녀에게 무언가 약점을 잡혀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처음에도 체루디는 나스치 하나만 쫒아 다녔었는데 어느 날부턴가 나스치가 휘미랑 메지와 어울리는 것을 알고는 셋이 모여서 놀 때도 같이 끼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체루디를 빼고 셋이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화를 내고 울어버리는 탓에 이제는 다들 뭘 하든지 그녀를 챙기게 되었다.
“ 집중은 잘된다 쳐도 술을 그렇게 마시고 공부 하면 머리에서 열 나지 않아? ”
휘미의 말에 체루디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일행이 맥주를 절반쯤 비웠을 때쯤 아래층에서 큰 환호성이 갑자기 일었다.
“ 한다! ”
2층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 일부가 난간쪽으로 몰려들었다. 휘미가 상황을 살펴보았다.
“ 뭔가 하나본데? ”
휘미의 말이 끝나자마자 탁한 현악기 소리가 박자를 몇 번 맞추더니 요란한 합주가 시작되었다. 비음과 기교가 잔뜩 들어간 여성의 목소리가 울림 관을 통해 술집 전체에 울려 퍼졌다.
“ 바로 이거였어! ”
체루디가 환호성을 질렀다.
맥주가 비자 메지는 곧바로 알코올이 좀 강한 증류주를 하나 시키고 새 술잔을 돌렸다. 체루디가 공부하다 말고 힐끗 바라봤지만 이번에도 술잔은 3개뿐이었다.
“ 괜찮네. 분위기 좋고 술도 독하고. ”
나스치가 킬킬대면서 잔을 채워나갔다. 공연이 계속될수록 술집의 분위기도 무르익어갔고 체루디는 더욱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메지는 술을 제일 먼저 다 비우고 둥그스름하게 홈이 파인 유리술병에 눈을 쳐박고 무언가를 관찰하며 일행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의 유일한 술버릇은 평소에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던것을 남에게 가르쳐주는 것이었는데 워낙 복잡한 탓에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두 남자는 메지를 종업원에게 억지로 맡겨놓고는 취기가 흐르자 쓸데없는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 쥬디하랑 제일 먼저 사귀는 남자는 누굴까. ”
휘미가 나스치를 향해 손을 뻗자 나스치는 휘미를, 휘미는 이번에는 메지를 가리켰다. 메지는 종업원이 도망가버리자 포기하고는 두 사람의 얘기를 잠자코 듣다가 얼굴을 붉히면서 과장되게 고개를 저었다.
“ 쥬디하는 나한테 과분한걸. ”
나스치는 메지를 향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 나는 그녀를 숭배해. ”
휘미는 어이없다는 듯 둘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 그럼 아나들이? ”
나스치는 주먹을 꽉쥐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휘미가 덧붙였다.
“ 맞아. 전부 불가능할거야. 쥬디하 주변에는 항상 여자애들이 너무 많잖아. 어떻게 접근할 수 조차 없어. ”
“ 맞아. 마치 용암이 펄펄끓는 해자에 둘러싸인 성벽처럼 갇혀있으니 말을 걸기가 뭐하지. 먼저 걸어준다면 모를까. ”
“ 아무튼 아나들 따위가 아무리 찔러봤자 쥬디하는 평생 꼼짝도 안 할거야. ”
휘미는 의자에 기대어 쥬디하와 함께 있던 시간을 회상해 보았다. 다이지 의학과 2학년인 그녀는 ‘냉염한’쥬디하 라는 별명에 걸맞게 조각 같은 외모에 냉랭한 분위기를 풍겨서 처음에는 쉽게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휘미, 메지랑은 예전 1학년 연금술 시간때 한 2주정도 우연히 같은 조에 편성되어 같이 실험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겉보기와는 다르게 너무도 쾌활하고 재미있는 그녀를 두 학생은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의 학생들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 음...쥬디하가 나를 진료해줄 거라면 나는 본관 꼭대기에서 뛰어내릴 거야. ”
메지가 순진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자 일행은 웃음을 터트렸지만 그와 거의 동시에 갑자기 반대편에서 거대한 함성 소리가 나버려서 순식간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주변의 시선이 모두 그쪽으로 집중되었다.
“ 무쇼냐쇼즈 다! ”
체루디가 반대편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함성이 들린 쪽에는 깃털 견장이 달린, 목소매가 길고 가슴에 수를 놓은 빳빳한 붉은색 외투에 안에는 활동성이 좋아 보이는 검은색 가죽옷을 걸친 10명 남짓한 사내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제각기 날의 폭이 넓고 긴 칼을 어깨나 허리 등에 차고 있었으며 구릿빛 피부에 머리는 하나같이 짧았다. 옷을 꽤 두껍게 입었음에도 몸의 다져진 근육의 형태가 고스란히 밖으로 드러날 정도였다. 일행이 모두 그들을 돌아보았을 때는 깃털 견장이 다른 무리보다 좀 더 긴자가 의자와 테이블에 발을 하나씩 올리고 무언가를 크게 외치는 중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각각 커다란 맥주잔이 들려져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시끄러운 술집 안에서도 끝까지 울릴 지경이었으며 울림 관을 통해 퍼져나오는 빈찻장의 노래소리를 압도할 지경이었다. 일행이 멍하니 그들을 보고만 있자 나스치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 저것들은 뭐야? ”
휘미가 나스치의 귀에 대고 말했다.
“ 말로만 듣던 사령청의 군사학교 무쇼냐쇼즈 애들인가 보네. 그 학교가 이 근처에 있다고 했지. ”
“ 무쇼나기 뭐? ”
나스치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휘미가 다시 말했다.
“ 몰라? 윔의 가장 강력한 군인 양성소. 무소냐쇼즈를 졸업한 자들이 나중에 대부분 윔의 장군들이 되고 있어. ”
휘미가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장 강력한 이라는 말에 나스치는 심기가 불편해졌다. 표정만 봐서는 당장 달려가서 얼굴을 마주대고 욕지거리라도 하고 올 모양이었다. 하지만 휘미는 나스치를 말릴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그럴만한 것이 나스치와 맞먹을 만한 등치의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는데 시퍼런 칼까지 차고 있으니 누구라도 함부로 할 상황은 아니었다. 예상대로 나스치는 시무룩해져서 양쪽 귀를 막고는 한동안 옆에서 메지가 신나게 퍼주는 술만 마시다가 술맛도 떨어졌는지 자꾸 나가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 야. 체루디는 어쩌고. ”
“ 여기에 계속 있으면 폭발할 지경이라니까. ”
결국 휘미는 체루디를 메지에게 맡겨놓고 나스치를 대리고 먼저 자리를 떴다.
술집 밖에는 수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고 떠들썩한 목소리는 거리마다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바깥으로 나오자마자부터 나스치는 욕지거리를 하기 시작했다.
“ 미치광이 풀을 삶은 물에다가 목욕을 시켜야 정신을 차릴 것들 ”
“ 살갖이 혹처럼 부어오를 텐데? ”
“ 그럼 온몸을 감전풀로 묶어놔야지. ”
나스치는 자신이 아는 모든 지식을 다 동원해서 온갖 동작을 섞어가며 무소냐쇼즈를 욕했다. 휘미는 나스치의 기분을 봐서 처음에는 동조해주다가 그의 묘사가 점점 끔찍해지자 고개를 저어버렸다. 나스치는 한참 뒤에야 술기운이 가시면서 화가 풀어지는 모양이었다.

어둠이 깊게 깔린 위머의 시가지는 밤이 되어서도 여전히 분주했다. 한참을 걸어 다이지로 올라가는 언덕에 다다르자 비로소 귓가에 바람소리나 나무 흔들리는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청월의 마지막 밤은 공기가 더욱 맑고 차가운 것 같았다. 두 학생이 심호흡을 하자 청월의 마력에 의해 술기운을 비롯해서 몸의 피로들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언덕 가장자리와 나무 사이사이에는 수많은 풀들이 달기운을 맞기 위해 피어 있었다. 이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풀 구경을 하며 걷기 시작했다.
“ 그러고 보니 시약실에서 미치광이 풀 잎사귀를 훔쳐서 파는 애들이 있다고 하던데. ”
나스치가 마치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말했다. 휘미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 시약실은 가는 길이 가장 복잡한 곳중 하나인데. 일반 학생들이 찾아 갈 수나 있나? 찾았다 해도 만약 걸리기라도 하면 대도서관을 3년 동안 청소해야 될지도 몰라”
“근데 난논교수가 미치광이 풀로 힘이 쌔지는 비약을 만든건 사실일까? ”
“ 그런건 어떻게든 그냥 각성제일 뿐이라고. 약효가 다 끝나면 부작용이 심할거야”
“ 아무튼 먹는 당시에는 정말 효과가 있을까?”
“ 글쌔 본적이 없으니 모르지.”
“ 난논이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해? ”
“ 그렇지 않으리라 믿어. 그래야 재밌잖아. ”
“ 왜 다른 교수들은 난논을 인정하지 않는걸까? ”
나스치가 계속 힘에 집착을 하는 이유는 아마도 아까 본 무쇼냐쇼즈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기숙사로 이어지는 다이지 중앙 길에 들어서자 나스치는 새로 산 공을 던져보고 들어간다며 강당 뒤편으로 사라졌다. 휘미는 중앙의 가파른 언덕길로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 길이 생기기 이전까지 이용되던 외곽의 허름한 돌계단길로 향했다. 지금은 중앙 언덕길이 새로 난 이후로 사람들의 인적이 끊겼지만 휘미는 이 돌길을 다이지에서 가장 멋진 길로 뽑았다. 길은 별관이 있는 언덕을 빙 돌아서 뻗어있는 탓에 가파르지는 않았지만 매우 길었고 밤에는 고요했다. 휘미는 가벼운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청월은 푸른 빛깔의 밤안개 사이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고 밤하늘은 따뜻하고 깊게 세상을 덮고 있었다. 휘미는 계단을 터덜터덜 올라가다가 별관이 보이자 무언가를 생각을 하고는 한번 웃은 뒤 흥얼거리며 기숙사의 낭하 속으로 걸어갔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8 00:5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