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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 산다고 했다. 나는 해논바.... ”
“ 알아 알아! 알고 있다고. 나스치가 해논바 스트레이트, 메지는 당근이 안 들어간 베이컨 볶음에 연어구이 추가…에 태엽시계의 구조에 대해 같이 토론해줘야 되고 체루디는 무스 아무거나랑 오렌지 말린 과자 됐지?. ”
“ 무스는 아무래도 산딸기가 좋겠어. ”
네 학생은 지금 다이지 본관 안을 해매고 있었다. 대도서관을 가야겠다는 휘미의 제안에 동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휘미는 간곡히 부탁하는 것으로도 안되자 결국 ‘아나들 식’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각자 원하는 것을 하나씩 사줄테니 가는 길 찾는 것을 도와달라고 한 것이다. 다이지의 대도서관으로 가기 위해서는 본관의 매우 깊숙하고 복잡한 낭하를 건너야 한다. 이곳은 고학년들도 가끔 헷갈려 하는 곳이어서 다들 기피하는 장소였다. 그래서 이들과 같이 한번에 찾아갈 자신이 없는 저학년들은 대부분 별관의 신도서관을 이용했다.
그런곳을 휘미가 가자고 했으니 다들 겁부터 먹은게 당연했다. 휘미와 메지, 나스치는 예전 선배들의 교육으로 길을 외우고는 있지만 워낙 복잡한 탓에 여전히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체루디야 지금 뒤를 졸졸 따라가기만 하고 있으니 편하겠지만 앞의 세 남학생은 서로 앞장서는 것을 꺼리며 묘하게 나란히 발을 맞춰 조금씩 앞으로 가고 있었다.
“ 낭하 족보라도 가져올걸. ”
메지가 혼잣말을 했으나 휘미는 고개를 휘저으며 말했다.
“ 어떻게 2학년이 부끄럽게 족보를 보겠어. ”
“ 그래도 그렇지. 난 뭐든 의미없이 외우는게 질색이야 ”
메지가 투덜거리자 아무 걱정없이 따라만 가던 체루디가 남자처럼 큰 목소리로 말했다.
“ 에헤? 뭐야 진짜 다들. ”
이들은 대꾸할 여유도 없이 정신없이 다리를 움직였다. 나스치는 자꾸 비슷한 길을 헤매는 듯하자 또 말을 꺼냈다.
“ 휘미. 분명... ”
“ 알았어 헤논바! 길이나 찾어. ”
나스치는 큭큭대더니 갑자기 걸음 속도를 늦춰 슬며시 뒤로 빠졌다. 그러자 휘미와 메지도 얼른 뒤로 쳐져서 다시 나스치와 나란히 균형을 맞추었다.
아래로 내려갔다가 올라갔다가 경사진 언덕같은 낭하를 지나고 지나 다섯 방향이 겹쳐진 계단에서 쳇바퀴를 돌듯 이곳저곳 걸어가자 세갈래로 난 터널식 문이 나왔다. 일행은 가장 오른쪽으로 향했고 이윽고 붉은 융단이 깔리고 보랏빛 등불이 빛나는 좁은 길목에 다다랐다.
“ 우와 이런곳도 있었네? ”
체루디는 신기하다는 듯 융단을 모둠발로 뛰어다니며 먼지를 내었다. 나머지 학생의 얼굴에도 안도의 표정이 나타났다.
“ 제대로 오긴 왔네. ”
나스치가 멀리서 커다란 이동수레로 책을 나르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말했다. 메지는 한숨을 쉬었다.
“ 후 돌아갈 때도 한걱정이네. 여긴 정말 올 곳이 못돼. ”
“ 여기보다 더 심한 고대문서반이나 시약실 한번 찾아가면 죽겠다. ”
“ 찾아만 가면 진짜 재밌겠지. ”
“ 가볼까? ”
세 학생의 대화를 옆에서 잠자코 듣던 체루디는 기대하는 얼굴이었지만, 아무도 진심으로 말한 사람은 없었다.
도서관 카운터에 있던 서무관은 이들의 2학년 팔찌와 체루디의 1학년용 목걸이를 보자 매우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대도서관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이지 귀걸이를 차고 있는 고학년들이기 때문이었다.
“ 1,2학년이면 아직 강의실 발씨도 제대로 익지 않았을 텐데 기특하구먼. ”
대도서관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 책들은 5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참나무 책장에 빼곡히 쌓여 있었고 분야별로 잘 정돈되어 있었다. 도서관 벽은 세 방향이 모두 투명한 유리로 트여져 있어서 햇빛을 잘 받는 구조였고 책의 온전한 보존을 위해 제습용 숯이 벽면을 따라 끝없이 깔려 있었다.
도서관 앞에서 개인용 사다리를 하나씩 받아 안으로 들어온 일행은 막상 도서관 안에 도착하자 희색이 되어 제각기 사다리를 끌고 흩어져 버렸다. 체루디와 메지는 수리학과 공학등의 코너로 가서 수십권의 책으로 성벽을 만들어 놓고 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나스치는 주로 운동과 관련된 책이 있나 둘러보더니 이야기책 한권을 가지고 구석으로 사라져 버렸다. 대도서관에는 상업이나 화폐에 관련된 분류 칸이 따로 없어서 휘미는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사다리를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 해야만 했다. 세계의 모든 책들이 다 있다는 대도서관에도 휘미가 찾는 분야의 책은 찾기 어려웠다. 몇 시간 동안을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던 휘미는 지쳐서 사다리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하도 많은 책을 보다보니 눈까지 아파왔다. 그런데 휘미가 곁눈을 살짝 떴을 때 맨 아래 칸에 ‘상업’ 이라는 두글자가 또렷하게 보였다. 휘미는 누가 뺏어가기라도 할 듯 얼른 책을 꺼내들었다. 나무가 정교하게 새김질된 겉표지는 얇게 세공한 나무껍데기를 여러번 덧씌운 듯 보였고 그 가운데에 금색 박음실로 ‘상업’ 이라고 쓰여 있었다. 책등의 접합부는 표지와 수백개의 비단실로 연결되어 었었으며 책장은 양피지로 되어 있다.
‘ 저자는? ’
휘미는 책을 잡고있던 오른손을 슬며시 때었고 그 자리에는 ‘싀드랍 위스타만지 백번째 여행끝에 쓰다.’ 라고 쓰여있었다. 휘미는 좋아 어쩔줄 모르는 얼굴로 책을 겨드랑이에 끼고는 뛰다시피 대도서관 입구로 달려 나왔다. 입구에는 이미 세명 모두 돌아와 있었다. 메지와 체루디는 무언가 다투고 있는듯 보였고 나스치는 책을 얼굴에 덮은 채 의자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메지와 체루디는 휘미가 돌아오는 것을 보자마자 그를 손짓하여 부르더니 곧장 물었다.
“ 피스너가 누군지 알지? ”
휘미는 생각하느라 눈동자를 굴리더니 대답했다.
“ 당연히 알지. 근데 뜬금없이 그건 왜. ”
그러자 메지가 얼른 말했다.
“ 피스너는 기공학자였지 않아? ”
“ 휘미오빠, 피스너는 건축가였어 그지? ”
체루디도 머리를 들이밀며 말했다. 휘미는 둘의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말했다.
“ 피스너는 지리학자였지 무슨 소리야. ”
메지와 체루디는 맥이 빠진다는 표정이었다. 휘미는 실소를 머금고 말했다.
“ 설마 그것 때문에 둘이 그렇게 심각하게 있던 거야? ”
그러자 메지가 말했다.
“ 우리 뒤를 봐. ”
휘미는 그대로 고개를 꺾어 뒤를 바라보았다. 이들이 앉아있는 위치는 도서관 정중앙의 벽쪽이었는데 커다란 화강암 벽 중앙에는 단정한 글씨체로 문장 하나가 적혀져 있었다.

「 찾아온 길은 이곳의 출발선에 불과하다. - 베라린 피스너 」

“ 이게 뭔 말이야. ”

휘미가 메지에게 묻자 체루디가 메지의 등짝을 때리며 말했다.

“ 봐봐. 휘미 오빠도 모를 거랬지? ”

휘미는 그 말에 팔짱을 끼고 좀더 세심하게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몇 초동안 그러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말했다.

“ 여기까지 찾아온 길은 이 도서관에 비하면 그리 복잡한게 아니라는 소리 같은데. ”

메지가 멍한 얼굴로 도서관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 여기가 그렇게 넓나? ”

그러자 체루디가 메지의 귀에다 대고 소리 질렀다.

“ 바보 메지! 책에서 얻는 지식의 길이 낭하의 미로보다도 더 복잡하고 멀다 뭐 그런 말이겠지. ”

“ 그런 말이었나. ”

“ 그런 말이었군. ”

메지와 휘미가 이어서 똑같은 말을 내밷었다. 체루디는 두 학생을 향해 코를 찡긋 하며 주먹을 얼굴앞에 들어올려 보였다.

“ 아무튼! 피스너 같은 위대한 학자가 건물 몇 개 새운 거 때문에 건축가로 불릴 수는 없지. 이 사람이 만든 발명품이 몇십개가 되는데. ”

메지는 답답하다는듯이 말했다.

“ 무슨소리야. 대륙곳곳에 피스너가 세운 건물은 몇백 개가 넘을걸? 물론 이 다이지도 포함해서. ”
체루디가 반박하자 휘미가 끼어들었다.
“ 다들 잠깐, 피스너가 만들어냈다는 연금술 공식들을 생각해봐...연금학자 였나? ”
그때 나스치가 심하게 코를 고는 바람에 일행은 그를 먼저 일으켜 세워야만 했다. 그는 졸린 말투로 중얼거렸다.
“ 피스너?..누구...아아 음악가잖아. ”

돌아오는 길에도 이들은 피스너에 관한 소문들에 대해 토론했다. 다이지는 물론 대륙의 사람들이라면 피스너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진부한 소재가 되어있었지만 그에대한 궁금증은 풀리지 않은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네 학생은 이제는 피스너가 무슨 학자였는가 외에도 그가 어느나라 사람이고 언제 살았었는지 전부 나름대로의 생각을 늘어놓았다. 체루디는 피스너가 여자였다는 주장까지 해서 질리게 만들었다. 각자 정신없이 떠들던 중 휘미가 외쳤다.
“ 잠깐, 다들 확실하지 않은 소문가지고 그러지 말자고. 그 사람, 뭐 자서전이나 그런게 있을거 아냐.”
메지는 낭하 벽의 구조를 손으로 더듬어가며 말했다.
“ 난 그 사람 책 본적이 없어. ”
체루디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휘미가 말했다.
“ 사실 그건 나도 알고 있었어. 근데 좀 이상하지 않아? 그 사람이 직접 쓴 책은 나도 본 적이 없어. 가장 위대한 학자라는 사람이, 쓴 책이 한권도 안남아 있다는 게 말이 돼? ”
체루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 하긴, 피스너 언니가 연구한 거는 전부 후세사람들이 설명해 놓은 것만 있다? 자기가 직접 쓴 것은 없단 말이지.”
그러자 메지가 말했다.
“ 게다가 피스너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아예 전해지지도 않잖아. 실존했던 인물이 맞는가도 의심돼. ”
그러자 잠자코 있던 나스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 나는 아는데. 피스너 이야기. ”
반짝거리는 세 학생의 눈빛을 느낀 나스치는 고개를 돌려 씨익 웃었다. 휘미가 투덜대며 말했다.
“ 나스치는 정말 걷잡을 수 없군. 뭐하는 녀석인지도,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도 몰라. ”

“ 사실은 나스치 오빠가 피스너 손자였던거지. ”

체루디가 또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나스치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 무슨 말이야. 옛날에 동료들하고 위머 외곽을 떠돌면서 놀러 다닐 때 어떤 유랑자 아저씨가 알려준 것 뿐이라고. 분명 주인공 이름이 피스너였어. 사실 그땐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랐지만. ”
그는 뜸을 들이기 시작했다. 체루디의 눈매가 올라가면서 숨소리가 거칠어진 것을 느낀 그는 할 수 없이 말했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말하기 시작했다.

피스너 어렸을적 이야기 - <전쟁과 부의 추>

“ 자 모두 보시오. ”
온 대륙을 휘몰아쳤던 하늘전쟁이 일어나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 지름이 30미터는 될 법한 움푹 파인 모양의 둥그런 마을광장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비록 군데군데 깨어지고 잡초도 무성한 낡은 장소였지만 이 정도 사람들이 모인 것만으로도 레비지 징집관은 뿌듯했다. 그는 만족스러운 눈으로 광장 전체를 천천히 둘러본 뒤 양 손을 3미터 정도 길이의 거대한 수평 양팔 저울위에 가져갔다. 말을 탄 여행객, 재봉질을 하다 나온 소년, 작업복에 묻은 도료가 채 마르지 않아 햇빛에 윤기가 반짝거리는 작업공들, 군중에 이리저리 밀리면서 주름잡힌 눈을 억지로 뜨고 서 있는 늙은이까지 모든 이의 시선이 그의 손으로 몰렸다.
“ 모두들 이것을 보십시오! 이게 바로 우리나라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입니다. ”
징집관이 손으로 가리킨 양팔 저울의 가운데에는 ‘세상’ 이라는 글씨가 매우 큼직하게 쓰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양 옆에는 많은 주머니들과 무기들이 놓여 있었다.
“ 세상이 기울어지지 않고 순탄해 지려면! 이런 가난한 짓은 다 필요가 없습니다! ”
그는 오른쪽 저울에 먼저 가난과 고통이라고 쓰인 주머니를 올려놓은 뒤 왼쪽 저울에 칼과 방패를 올려놓았다. 그러자 무게가 작았던 가난과 고통 주머니는 균형을 잃고 왼쪽으로 쏠려 저울에서 떨어졌다. 주머니가 떨어지면서 안에 있던 밀과 귀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군중들의 시선이 굳어졌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광장에서 메아리 쳤다. 레비지 징집관은 분위기를 틈타 더욱 강한 어조로 말했다.
“ 바로 전쟁으로 땅을 빼앗고 적군을 싸워 물리쳐야만이! 엄청난 부를 획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를 얻게 되어야 만이 보다시피 세상이 평등해지고! 안정될 것입니다. ”
그는 부를 강조해서 말하면서 무기가 올려져 있는 접시의 반대편 접시에 ‘부’ 라고 쓰여 있는 주머니를 놓았다. 주머니는 철렁 소리를 내었고 그 안에 든 것이 금화라는 것은 누구나 눈치 챌 수 있었다. 저울은 잠시 뒤뚱거리다가 양쪽의 무게가 맞았는지 멋지게 수평을 유지하였고 제법 이해력이 빠른 군중들로부터 탄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군대에 대해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적이 있는 남자들은 전부 맨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 전쟁입니다! 여러분! 전쟁만이 우리나라를 이렇게 안정되고 풍족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자손들이 배불리 먹고 편안하게 잘 수 있습니다! 자 모두들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어서... ”
레비지 징집관이 열정적으로 떠들고 있던 도중이었다. 언제 왔는지 모르게 징집관의 앞에는 한 조그만 꼬마가 서있었다. 꼬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미동도 하지 않고 징집관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징집관은 이 조그만 방해자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꼬마에게는 뭔지 모를 이상한 힘이 풍겨져 나왔고 자신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몸이 마비된 듯 굳어버렸다. 징집관이 말을 멈춤과 함께 광장은 조용해졌고 작은 웅성거림 들만이 광장을 맴돌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징집관은 얼른 정신을 차렸지만 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꼬마는 천천히 저울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자신의 키보다도 큰 칼과 방패를 땅에 내려놓고, 반대편으로 다시 걸어가 금화가 든 주머니도 바닥에 내려놓았다.

빈 저울은 쇳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마침내 균형을 잡았다.
똑같은 수평이었다.
저울 위에 칼,방패, 돈 등이 잔뜩 올려져 있을 때와 똑같이 수평이었다.

징집관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나이어린 불청객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꼬마는 저울이 움직임을 멈추고 평행을 유지하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뒤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징집관을 한번 바라보고, 군중들을 바라보고선, 마침내 입을 열었다.
“ 전쟁, 돈, 아무것도 없이도 세상은 여전히 평평한걸요. ”
꼬마의 이름이 베라린 피스너, 그때 나이 여섯 살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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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스치가 이야기를 끝내자 일행은 전부 나름대로의 생각에 잠긴 듯 했다. 정적을 깬 것은 휘미였다.
“ 진짜 피스너 이야기 맞아? ”
휘미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스치에게 묻자 나스치는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무슨 동작을 하려다가 갑자기 그만두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 사실 잘 몰라. 나도 그냥 들은 이야기라니깐. ”
휘미가 말했다.
“ 역시, 멋지긴 한데 뭔가 한참 부족해 보인단 말이지. 피스너가 자연주의자였나? 내가보기엔, 세상 사람들이 대부분 위대한 학자 하면 피스너 한명밖에 생각해 내지 못한단 말이야. 그래서 멋있고 재치 있는 이야기가 있으면 다들 피스너가 한거라고 생각하는 걸꺼야. 야! 어떻게 생각해? 메지는 무슨 얘기만 하면 그 안에 들어가서 나오질 않는군. ”
“ 다들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
체루디가 또 큰 목소리로 이야기 하는 바람에 혼자만의 상상중이던 메지가 깜짝놀라 펄쩍 뛰었다. 그녀가 말했다.
“ 피스너가 했건 안했건 멋진 이야기잖아. 피스너라면 그정도 말은 분명 했을거니까 그냥 그런 얘기 한걸로 해두자. 어때? ”
체루디는 마음대로 결론을 내리더니 갑자기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낭하를 다 빠져나와 멀리 승강기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아무래도 감상적으로 생각하는게 더 좋은 모양이었다. 휘미와 메지도 더 이상 그 이야기에 대해서 화두를 삼지 않았다.

일행과 헤어진 휘미는 메지와 함께 기숙사 방으로 가기위해 외곽 계단으로 향했다. 나스치는 그의 운동 두럭 에서 모임이 있다며 가버렸고 체루디는 목욕을 해야 한다며 기숙사 선배를 만나러 가버렸다. 메지는 신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 체루디가 우리 보다 기숙사 선배랑 더 하고 싶어 하는 일은 목욕뿐일 거야. ”
두 학생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이들은 오랜만에 방에 모여 연금술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청단월이 얼마 남지 않은데다가 무엇보다도 연금술 만큼은 아나들한테 절대 밀려서는 안됐기 때문에 반드시 공부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두 학생이 기숙사의 커다란 격자무늬 벽돌대문을 통과했을 때 휘미의 기숙사 후배인 보색이 네활개를 치며 활짝 웃는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휘미를 보자마자 손을 흔들며 뛰어오면서 말했다.
“ 선배, 제가 ‘처녀이끼’를 몇 개 캐는지 똑똑히 봐 두세요. ”
“ 1학년도 가? ”
“ 당연한 말씀입니다요. 참 저 오늘 두럭가요! 늦게옴. ”
보색은 몇 번씩이나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네활개를 치며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휘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 잘됐다! 방해꾼 하나 또 없엤네.”
휘미의 방에 도착한 둘은 도서관에서 가져온 어마어마한 두께의 식물도감을 책상 위에 두고 마주 앉았다. 식물도감에는 연금술에 사용되는 각종 풀들이 자세한 설명과 함께 그려져 있었다.
“ 역시 해100(100번 풀의 음어) 전까지 의 해(풀)들은 우리가 평소에도 자주 쓰는 것들이야. ”
그러자 메지가 정색을 하며 휘미에게 말했다.
“ 무슨 해? 뜨는해 말하는 건가? ”
휘미는 새삼스레 정색하는 메지를 향해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 규준 보안 해제. ”

“ 그림자로 손짓하자는 거였군. (음어로 대화하자는 거였군) ”

그제서야 메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두 학생은 식물도감을 넘겨가며 이야기했다.
“ 해 500정도 까지도 그나마 한번씩은 본 풀들이야. 촉매법이나 혼합용도 까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
책장을 빠르게 넘기던 메지는 책의 제일 뒤쪽을 잡고 끝부분을 넘겨보다가 말했다.
“ 와, 이게 말로만 듣던 그 유명한 해 1239 다. ”
두 학생이 펼친 장에는 세 갈래로 휘어져 올라간 줄기가 서로 만나 겹쳐진 원의 모습으로 붙어버린 풀이 있었다. 마치 공예품처럼 정교하게 생긴 아주 특이한 모양의 풀이었다.
“ 휴 정말 유명한 풀이지. 이걸 진짜 발견하는 사람이 있을까. ”
 그는 설명내용을 소리내어 읽어보았다.
“ 역시 청단월에만 피는 아주 희귀한 풀, 연금술 학자 도스준이 처음 발견했다고... ‘도스준풀’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모습이 여성의 생식기와도 닮았다고 하여 ‘처녀이끼’ 라는 이름으로 자주 쓰인다. 청단월이 뜨는 때 음지식물 사이에서 조용히 나타나며 소량을 복용시 나른함과 행복감을 유발하고 마치 사랑에 빠진 듯한 환각증상이 나타난다. 동물이 먹을경우 어떤 동물이라도 온순해지고 남을 잘 따르게 된다. 풀의 뿌리를 건드리면 바로 죽어버리기 때문에 조심해서 다루어야 한다. 희귀한 풀임에도 사핀등 북쪽지방에서는 이것을 환각제로 재배하고 있다고 하지만, 근거가 없는 말일 가능성이 높다.. ”
휘미는 읽으면서 들뜨는 표정을 감출수 없었고 메지는 입까지 벌리고 있었다.
“ 정말 끝내주는군. ”
“ 이번에 가서 이런거나 발견했으면 좋겠다. ”
두 학생은 모두 기대에 부풀어 올랐다. 휘미는 다시 책장을 넘기다가 한군데에 멈췄다. 둥그렇게 말린 잎의 끝에 잘 보이지 않는 가늘고 뾰족한 독침이 있으나 그 외에는 매우 평범하게 생긴 풀이었다.
“ 이것은 쇠뿔갈퀴 풀로 매우 위험한 풀이다. 어떤 조건에서 피어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잎의 끝에는 독침이 있는데 찔릴 경우 곧바로 사지가 마비되고 심장이 굳어 죽어버릴 정도의 맹독이 온몸에 퍼진다. 잎을 가열할 경우 엄청난 폭발을 일으켜서 반경 10m안에 있는 물체는 모두 사라지게 만든다. 보통의 다른 풀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다행히 청단월날만 피는 풀이기 때문에 일반인이 이 풀을 접할 가능성은 극히 드물다. 하지만 평소에도 큰 산불이 났을 때 나는 폭발소리는 이 풀로 인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
메지가 무릎을 쳤다.
“ 이거 알아. 옛날에 이거 때문에 다이지 연구실이 흔적도 없이 날아간 적이 있데. 그때 실험하던 교수 3명이 모두 죽었다지. ”
휘미는 만족스럽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작은 종이에 체크를 하며 말했다.
“ 그럼 청단월 때 이걸 찾아서 아나들 따위의 입술에 물리고 불을 붙이자. ”
메지의 눈이 번뜩거린 이유는 분명 그의 말을 실제처럼 상상해 보았기 때문이 틀림없다.

자정이 넘어서 까지 두 학생은 식물도감을 살피고 또 살폈다. 주로 청단월 날 볼 수 있다는 식물을 위주로 생김새과 쓰임새를 외웠다. 묵월기인 탓에 휘미는 메지가 가고 난 뒤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오히려 밤이 깊어갈 수록 정신이 더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아까 대도서관에서 빌려온 ‘상업’ 이라는 제목의 책을 펼쳤다.
“ 빵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빵은 잘 팔릴 것이다. 하지만 모든 빵상인이 전부 부자가 되는것은 아니다. 경쟁자가 많아진다면 공급이 늘어 가격이 줄어듦으로 빵을 아무리 많이 팔아도 부자가 되지 못한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빵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빵을 파는 사람이 자신 이외에 드물거나, 빵의 맛이 훨씬 뛰어나서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으로 많이 팔아야만 한다. ”
“ 똑같은 빵집이 두개 있다. 맛도 같다고 치자. 가격을 어떻게 선정하느냐, 위치를 어디에 잡느냐 등에따라 한 빵집은 수많은 돈을 벌어드릴 수 있고 다른 빵집은 파리가 날려 문을 닫아버릴 수도 있다.”
휘미는 침을 삼켜가며 책을 돌파했다. 예전 시대의 용어들도 나오고 뮤케날쪽의 사투리로 쓰인 부분도 많았지만 다양한 책 종류를 많이 접해본 그는 이내 적응하여 몰입하기 시작했다. 중간에 보색이 들어와 쿵쿵 소리를 내며 돌아다녔지만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책에 빠져들었다. 책은 갈수록 내용이 깊어졌다. 그는 책의 거의 절반가량을 다 읽고서야 잠시 숨을 골랐고 잠이 들어버렸다.

“ 메지? ”
휘미는 새하얀 광장을 둘러보았다. 메지는 휘미의 바로 옆에 서서 우두커니 손목시계를 보고 있었다. 메지는 손목시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 시계를 뒤쪽에서 바라보면 분침과 시침은 과거로 흘러가버린다고. ”
그러자 메지 옆에서 턱을 괴고 앉아 있던 나이 어린 피스너가 중얼거렸다.
“ 분침, 시침도 모두 평행하면 좋을텐데 ”
메지는 못마땅하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휘미가 시선을 반대편으로 돌리자 멀리서 체루디를 등에 업은 나스치가 무소냐쇼즈를 상대로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놀란 휘미가 달려가자 나스치는 칼을 휘미에게 던지고 잽싸게 도망가버렸다.
“ 휘미도 날 업어줄꺼지? ”
그때 체루디가 말했다. 아니, 체루디 머리를 한 쥬디하 얼굴이었다. 휘미는 자기도 모르게 쥬디하의 손목을 잡으려고 했지만 쥬디하는 어디간지 없고 앞에는 수백명의 무소냐쇼즈가 와 있었다.
“ 저울위에 당신 칼이 있잖아요. ”
당황한 휘미가 저울에 있던 칼을 집어들었지만 다리를 베이는 느낌과 함께 뒤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의 머리 위로 철갑을 두른 무쇼냐쇼즈의 얼굴들이 일제히 나타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삼각형을 이뤄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거기엔 나스치와 메지도 있었으며 아나들도 있고 휘미 자신도 있었다.

휘미는 짧은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머리가 살짝 아파왔다. 가끔씩 꾸는 개꿈을 꾼 듯 했지만 꿈에서 자신의 얼굴을 본 것 때문에 기분이 묘했다. 꿈속의 그는 매우 어두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는 그림자가 너무 짙게 져서 공허함을 이루고 있을 정도였다. 잠시 동안 꿈에 대해서 생각 하던 그는 더 이상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훌쩍 밖으로 나갔다.

“ 제발 조용히들 하십시오! ”

청단월이 4일 앞으로 다가오자 연금술 교수들은 1,2,3 반의 학생들을 모두 모아 강당에서 공동수업을 하기로 했다. 강당은 지은지 20년도 안된 신식 걸물로 전체 모습은 원형의 분화구 형태로 되어 있었다. 맨 밑에는 교전과 탁자가 설치되어 있고 위쪽으로는 전부 나무의자가 층층히 사방으로 둘러져 있다. 세 반의 인원을 모두 수용하고도 남을 크기였지만 학생들이 다른 반과 섞이자 시장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각 반의 대표들이 정신없이 한쪽을 진정시키면 다른 쪽이 소란스러워 지는 것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 와, 이건 기평회 때보다 더한데. ”
나스치는 강당 문을 들어서면서 중얼거렸다. 그는 의자 맨 위쪽 열 구석에서 메지가 혼자 땅바닥에 앉아 잉크통을 올린 채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쪽으로 향했다.
메지는 온통 집중이 쏠린 표정으로 가죽 끈으로 단단하게 묶인 작은 수첩에 글을 적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옆의 두꺼운 식물도감을 슥 보더니 옮겨 적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스치는 그에게 다가가면서 뭐라고 말을 꺼내려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보더니 비명 비슷한 헛숨을 삼키고 말았다.
“ 뭘 그렇게 쓰니? ”
메지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반응 없이 잠시동안 펜을 계속 놀리다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는 화들짝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메지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 쥬디하? ”
메지의 바로 앞에는 쥬디하가 서 있었다. 검은 단발머리에 새카만 눈동자, 남을 살짝 노려보는 듯한 관능적인눈매와 작은 얼굴, 새하얀 피부, 장난끼어린 미소가 담겨있는 듯한 붉은 입술, 쥬디하는 눈웃음으로 인사를 하더니 메지가 글을 쓰고 있던 의자 옆에 앉았다. 메지는 어정쩡한 동작으로 일어나 수첩을 만지작거리며 어쩔 줄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나스치는 열 발자국정도 떨어진 곳에서 몸이 굳은 듯이 미동도 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쥬디하는 메지의 얼굴을 갸우뚱거리며 보더니 풋 웃고는 그의 손에 들려있던 수첩을 빼앗았다.
“ 이거 뭐야? 응? 도감에 있는 식물들 같은데? ”
메지는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다.
“ 아, 어. 정리좀 하려고. ”
“ 역시 메지는 너무 똑똑해. 저번에 실험도 너무 잘하더라. ”
 메지는 정신이 약간 들었는지 쥬디하 옆에 앉아서 같이 수첩을 들여다보았다. 쥬디하는 수첩을 쭉 훑어보더니 그에게 다시 내밀었다. 메지는 손을 뻗어 수첩을 받으려 했으나 쥬디하는 다시 손을 빼어 자기 품으로 가져갔다.
“ 이거 다쓰면 나도 보여주면 안돼? ”
메지는 잠시 생각하는 척 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오늘안에 다 완성할 거야. ”
쥬디하는 싱긋 웃더니 그의 품으로 수첩을 건냈다. 쥬디하가 돌아갈 생각이 없는듯 보이자 메지가 먼저 말을 걸었다.
“ 애들은 다 어디갔어? 같이 있는 여자애들. ”
쥬디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 어휴 저기 지금 너무 시끄러워서 싫어. 복잡해서 어디로 도망갈까 둘러보는데 네가 여기 있더라구.”
“ 아. "
메지가 고개를 끄덕일 때쯤 나스치가 성큼성큼 다가와 인사를 건냈다.
“ 어라. 이게 누구야. ‘냉염한 쥬디하’ 오랜만이네. ”
나스치가 밝게 웃으며 다가오자 쥬디하도 웃으며 말했다.
“ 나스치! 내 별명 기억하고 있네. ”
나스치는 과장되게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메지 옆에 앉았다. 메지는 제정신이 아닌듯보였다. 메지는 다소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최대한 신난다는 듯이 이야기 했다.
“ 도감 옮기다 보니까 진짜 신기한 풀들이 많더라. 복용하면 사랑에 빠지게 하는 풀도 있어. ”
“ 어머, 정말? 청단월날 뜨는것 중에? ”
메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쥬디하는 말했다.
“ 사랑에 빠지게 한다니...정말 신기하다. ”
쥬디하의 말에 나스치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메지는 실수한 것이 분명했다. 쥬디하는 의학과였기 때문에 약초학보다 연금술을 그렇게 깊게 공부하지 못했기에 망정이지 그녀가 처녀이끼에 대한 소문을 알았으면 어땠을까. 나스치는 넋이 나간 메지가 처녀이끼의 모양에 대해 설명해 주기라도 한다면 기필코 막아야겠다고 다짐했다.
“ 제!발! 조용히 하십시오. 교수님들께서 들어오십니다! ”
그때 세명의 반 대표들이 있는힘껏 동시에 소리치자 그제서야 학생들은 제각기 자리를 찾아 앉기 시작했다.
“ 나 그럼 가볼게. 완성하면 꼭 보여줘야돼?. ”
쥬디하는 그녀의 친구들 사이로 뛰어 내려가며 말했다. 메지와 나스치는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두 학생은 그녀가 학생들 틈사이로 사라질 때가지 말없이 서 있었다. 그러자 잠시뒤 누군가가 달려와 두 학생의 목을 감싸고 매달렸다. 휘미였다.
“ 어떻게 된건지 빨리 말 못할까. ”
휘미가 두 학생의 목을 조르며 말했다. 그는 멀리서 두 학생이 그녀와 같이 있는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차마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나스치는 기침을 몇 번 한 후 자초지종을 이야기했고 휘미는 기분이 축 가라앉은 채로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 쳇. 어쩐지 꿈자리가 뒤숭숭 하더니만. ”
메지는 아직도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침까지 흘리며 웃고 있었다.
“ 모두 기좌하십시오. 연금술과의 세 교수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
연금술과의 2학년을 맡고 있는 모든 교수들이 들어왔고 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기가마인 교수가 학생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 여러분들 알다시피 앞으로 4일 후면 청단월이 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3일간은 청단월 날에 하게 될 그요네 산에서의 야외 실습을 대비하여 조 편성 및 실습시 주의사항과 일정을 알리고,학생들이 할 역할에 대해서 설명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난논 교수께서 조 편성과 준비물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
난논교수는 박수를 두 번 치더니 학생들을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 자. 우선 31일날 정확히 오후 5시에 다이지 정문에서 모여서 산까지 같이 이동할겁니다. 우리 2학년은 이번에는 그요네 산 동편을 오를 예정이에요. ”

그러자 학생들 사이에 동요가 일었다. 휘미도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 동편은 가본적이 없잖아? 풀이 잘 안난다며? ”

“ 거짓소문 이었던 거지. ”

나스치가 대답했다. 반장들이 다시 나서서 가까스로 동요를 진정 시키자 난논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 준비물은 저번하고 크게 다를건 없고 바구니, 천 장갑 등만 잘 준비해오면 되겠구요. 추가로 개인용 초나 등불이 있으면 가져오면 좋겠군요. 그리고 도착해서는 조를 이뤄 행동 할텐데 이번에는 각 조당 10명씩 편성하겠어요. 지금부터 5분정도 시간을 줄테니까 최대한 빨리 서로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조를 이뤄서 모여 앉아봐요. 시작합시다!”
학생들은 난논교수의 빠른 진행에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곧바로 강당 안을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서로 팀을 구하느라 일어나 부산하게 돌아다녔으나 세 학생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주저앉아서 구경 하고 앉아 있었다. 휘미는 메지가 일어나지 않자 가만히 있었는데 사실 메지는 쥬디하 생각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해서 멍하니 있던 것이었다. 나스치는 서두르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빼고는 예쁜 여자들이 모이는 조가 어딘지 눈을 돌리며 파악만 할 뿐이었다. 나스치의 눈에 아나들과 옴와든이 그의 몇몇 패거리들과 함께 쥬디하의 곁으로 가서 그녀와 이야기 하는 것이 보였지만 쥬디하는 이내 그녀 주변의 여자들 열 명에게 둘러싸여 금방 조를 이뤄버렸다. 한 3분쯤 지났을까. 별 생각없이 구경하고 있던 휘미가 물었다.
“ 잠깐, 우린 세 명에서 해? ”
그러자 나스치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 안돼! 저,저기 여자애들 조가 한 서너 명 정도가 부족한것 같은데. ”
휘미는 나스치가 가리킨 쪽을 보다가 메지를 바라봤고 여태까지도 그가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는 어깨로 그를 밀었다. 메지가 뭐라고 하려고 하던 찰나 그들에게 다가온 무리가 있었다.
“ 어이. ”
목소리가 난 쪽에는 아나들이 대여섯 명이나 되는 그의 무리를 대리고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물론 그 틈엔 옴와든도 있있다. 세학생의 눈매가 곧장 날카로워 졌다. 휘미가 대답했다.
“ 웬일로 납시셨나? ”
아나들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떨궈 바닥을 한번 바라보더니 거만한 목소리로 이야기 했다.
“ 난 이번에 실력이 가장 뛰어난 애들로만 이루어진 조를 만들어 보고 싶은데. 청단월이 자주 있는 기회도 아니고. 뛰어난 애들하고 가야 이번에 괜찮은 걸 발견할 확률이 높겠지. ”
“ 뭐. 그러려면 일단 네가 조에서 없어져야 되잖아. ”
휘미의 말에 나스치는 통쾌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아나들은 표정이 굳어 입을 다물었다가 억지로 다시 웃음지으며 말했다.
“ 으흠. 아무튼. 너희랑 같이 가보는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이지. ”
아나들이 한번 접고 나오자 휘미도 이번에는 뭐라고 따로 말하지는 않았다. 세 학생은 서로를 바라보았고 무표정하게 다들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나스치가 사나운 얼굴로 아나들 옆에 있는 옴와든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 대신 쟤는 좀 빼면 안돼? ”
그러자 아나들은 잠시 망설이더니 옴와든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이야기 했고 옴와든은 일행을 찡그린 표정으로 쏘아보더니 뒤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나들은 일행을 향해 조소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 조장은 내가 맡아도 괜찮지? 필요한건 우리 쪽에서 완벽하게 준비해 올테니까. 너흰 연구만 열심히 해와. ”
아나들은 그 말과 함께 다시 그가 앉아있던 자리로 무리들과 가버렸다. 휘미는 아나들이 완전히 멀어지자 말했다.
“ 뭐. 놀라운 일이지만, 여하튼 편하게 됐네. 준비할 것도 없고. ”
실제로 아나들이 직접 휘미 일행에게 말을 건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었다. 서로를 경계하고 비꼬기만 할 뿐 직접 마주쳐서 대화한 적은 기평회때 빼고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메지도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했다.
“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어.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건 절대 아니고. 그렇다고 아나들이 안 어울리게 굳이 우릴 인정해주는 것이 뭐 정정당당하게 경쟁해보려고 하는 건 아닌것 같고, 알겠다! 혹시 우리가 뭐라도 발견하면... ”
메지가 말을 줄이자 나스치가 이어서 말했다.
“ 우리 것을 자기가 가로채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