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조가 다 편성되자 난논교수는 자리에 앉았고 이번에는 도니 멜기 교수가 일어나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도감이나 기타 연금술 서적을 깊게 들여다 본 학생들은 알겠지만 청단월에는 우리에게 유용한 꽃만이 피는 게 아닙니다. 가장 쉬운 예로, 물론 감전풀을 아직까지 구분하지 못하는 학생은 없겠지만 청단월이 뜨면 으래 여기저기서 감전풀이 피어납니다. 하지만 감전풀 이외에도 폭발의 위험이 있거나 찔리기만 해도 생명을 앗아가는 매우 위험한 풀들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풀을 발견하는 즉시 청단월 당일 나눠줄 깃발을 꼽고 교수님들에게 알리길 바랍니다. 귀한 풀을 많이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그 조는 점수를 높게 줄 예정입니다. 그리고 검증되지 않은 풀을 잘못 캐어 사용했다가는 위험할 수 있으므로 청단월날 학생들이 캐낸 모든 풀들은 우선 시약실로 옮겨서 정밀하게 검사를 한 후 강의시간에 사용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교수의 말을 듣던 도중 나스치가 중얼거렸다.
“ 미치광이 풀 하나만 빼돌려 볼까? ”
휘미는 피식 웃었다. 메지가 옆에서 말했다.“ 근데 말이지. 물론 그럴 가능성은 적겠지만... ”
메지는 말을 잠시 멈추고는 목소리를 좀 더 낮춰서 이어 말했다.
“ 미치광이 풀 정도가 아니라 만약 진짜 엄청 귀한풀 하나 발견하면 어떻게 되는거야?”
메지의 말에 휘미와 나스치는 각각의 상상에 빠졌다.

일행이 청단월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동안 어느새 시간은 묵월의 마지막 날로 들어섰다. 그동안 옴와든이 접근해서 나스치에게 저번 조를 짤 때의 일을 빌미로 위협 비슷한 것을 하다가 되려 된통 당한 일을 빼고는 큰일은 없었다. 나스치도 두럭에 나가지 않을 정도로 연금술 공부를 하는데 열을 올렸고 세 학생은 만반의 준비를 다 했다.
“ 그럼 이제 난논 교수님한테 가볼까? ”
난논 교수를 만나는 것은 언제나 이들에게 설레는 일이었다. 연금술과의 대부분의 교수들은 연금술의 실용적인 지식에 대해서는 매우 보수적이었으며 이론적인 경향이 강해서 실험법이나 추출법 같은 연구자체에 큰 비중을 두었지만, 난논 교수만은 그렇지 않았다. 주변의 눈이 있는 탓에 겉으로는 크게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그는 연구실에서 항상 새롭고 신기한 풀 실험에 몰두해 있었고 찾아오는 믿음직한 학생들에게는 그가 연구하는 것들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물론 절대로 직접 보여주는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 나도 너희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란다. 하지만 한명에게 보여주기 시작하면 소문이 퍼지는건 금방이란 말이야. 그럼 난 다이지를 떠나야 할 수도 있어.”

이런 핑계로 실제 그의 연구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 학생은 교수를 믿었다. 특히 청단월을 하루 앞둔 시점에서 난논이 무슨 실험을 준비 하는지도 궁금했기 때문에 이들은 교수와의 면담을 며칠전부터 예약해 놓은 상태였다.
“ 난논 교수의 연구실이... 좋은점은, 찾기 쉽다는 거지. ”
꽈배기 모양으로 생긴 계단 여러개가 위로 뻗어나가고 그 중간중간에 수십개의 문이 나 있는 독특한 지형을 이리저리 드나들며 휘미가 말했다. 바로 뒤에 따라가던 메지가 덧붙였다.
“ 그나마. ”
그래도 대도서관을 갈때와는 달리 일행은 길을 잘 안다는 듯 속도를 높여서 낭하를 뛰어다녔다. 이윽고 마치 동굴처럼 화강암으로 두껍게 사방에 벽을 쌓은 긴 복도를 따라가자 커다란 부채꼴 모양의 두꺼운 문이 굳게 닫힌 난논교수의 연구실이 나타났다. 일행은 연구실 문의 쇠로된 걸쇠를 두 번 두드렸고 반응이 없자 두 번 더 두드려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어디 나가셨나? ”
나스치의 말에 휘미가 고개를 갸우뚱 했다. 그는 메지의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 이시간쯤에 뵙기로 예약 했었잖아. ”
나스치는 문을 한 번 더 손으로 두들겨 본 뒤 조심스럽게 밀어 보았다. 문은 살짝 열리는듯 하더니 둔탁한 소리를 내며 잠금장치에 걸렸다.
“ 잠가놓았네. 진짜 안계신가 보다. ”
나스치의 말에 휘미가 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 분명 내일이 청단월이라 준비할게 많으셔서 깜빡 하신걸꺼야. 장비들을 챙기러 갔거나 하셨겠지. ”
메지는 바로 돌아가기가 아쉬운지 문 옆에 쪼그려 앉았다.
“ 그래도 좀 서운하네. 딱 10분만 기다려볼까. ”
메지의 말에는 다들 동의하는 표정이었다. 당장에 할일이 없어지자 휘미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잠을 청했고 메지는 도감의 내용을 옮긴 작은 가죽수첩을 꺼내어 보다가 벽의 신기한 문양들을 바라보며 혼자만의 상상속에 빠졌다. 나스치는 심심해지자 일어나서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돌아다니더니 연구실의 문을 다시 한 번 밀어보았다.
“ 이것좀 봐. ”
나스치가 힘을 주어 연구실 문을 다시 열자 문 안의 쇠로 된 잠금 장치가 다시 둔탁한 소리를 내며 막혔다. 문틈사이에는 손가락 하나정도가 들어갈 정도의 공간이 생겨 있었다. 나스치는 문틈사이로 연구실 안을 한참 들여다 보더니 다시 문의 손잡이를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였다. 시끄러운 소리에 참다못한 휘미가 나스치의 다리를 붙들며 말했다.
“ 제발 가만히 있으면 안되겠니. ”
그러나 나스치는 아랑곳 하지 않고 이번엔 문틈 안에 손을 뻗어 이곳저곳을 더듬기 시작했다.
“ 잠깐만 있어 봐. ”
그는 손가락을 최대한 집어넣어 걸쇠를 만지다가 안되자 배낭에서 기다란 펜을 꺼내어 걸쇠에 대었다. 그리고 덜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몇 번 움직이자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연구실의 문이 열려버렸다. 나스치는 자랑스럽게 두 학생을 쳐다보았고 휘미와 메지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 입을 다물지 못했다.
“ 미쳤어? 뭐하는 짓이야?! ”
휘미는 나스치를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았다. 메지는 크게 소리 지르지도 못하고 나스치를 향해 속삭였다. “ 근데 어떻게 했어? ” 휘미는 등에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나스치는 잠시 멈칫 하다가 말했다.
“ 열었는데 한번 안들어가볼래? ”
그러자 곧바로 휘미가 말했다.
“ 걸리면 어쩌고! ”
그제서야 나스치도 걱정되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일행은 애가타서 머리를 싸맸고 이런일에 회전이 빠른 휘미가 이야기했다.
“ 일단 이대로 도망은 안 돼. 우리가 지금 시간에 예약해 놓은 걸 알고 있잖아. 문이 가로로 잠기는 걸쇠로 되어있으니까... 나스치. 아까랑 반대로 하면 잠글 수도 있겠지? ”

나스치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다시 문을 닫고 펜을 이용해서 걸쇠를 움직여 보았다. 그는 열심히 펜을 움직여 문을 몇 번 덜그럭 거리더니 걸쇠를 잠그는데 성공했다.
“ 휴. ”
세 학생은 바닥에 주저앉아 땅이 꺼질 듯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들은 잠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고 앉아있다가 서로에게 시선을 마주쳤다. 서로의 시선을 한참동안 교환하자 세 학생은 모두가 생각하는 것이 일치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나스치는 피식 웃더니 다시 걸쇠에 펜을 가져갔다.
“ 한명씩만 들어가서 구경하고 나오자. 별일 있겠어? 길이 양쪽이니 두 명이 서로 망을 보고 있다가 누가 오는 것 같으면 알리면 되지. ”
나스치는 20초도 채 안되어 문을 다시 여는데 성공했고 일행은 서로 신호를 교환한 후 메지 - 휘미 - 나스치 순으로 연구실 안을 구경하기로 했다. 휘미는 잔뜩 긴장한 채 벽에 달라붙어 망을 보면서도 난논의 연구실을 볼 생각에 들떠 있었다. 교수가 평소 자랑하던 실험들을 하나라도 직접 확인해 본다면 휘미는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시간은 금방 흘러갔고 구경을 마친 메지가 멀리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 어때? 어때? ”
휘미가 다그치듯 물어보자 메지는 상기된 표정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휘미는 들뜬 마음에 전력 질주를 하다시피 낭하를 건너 교수의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연구실은 매우 넓었고 어두웠다. 곳곳에 연금술을 이용해 만든 환한 등불들이 걸려있긴 했지만 드넓은 연구실에 빛을 가득 채우기에는 부족해 보였다. 연구실 입구에서 직진으로 들어간 곳에는 학생들의 면담이나 회의 시에 사용하는 교수의 탁자가 있었다. 그러나 휘미는 이번엔 탁자 뒤로 돌아 계단을 따라 비밀에 싸여있던 깊숙한 실험실로 들어갔다. 약간 낮은 위치에 커다란 홀이 나타났다.
“ 우와!... ”
휘미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난논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수십개의 길다란 테이블 각각마다 최고급 시험대가 있었고 그 위의 실험 기구들에는 각종 액체들이 가득 차 있었다. 전부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휘미가 제일 가까운 테이블로 다가가자 거기에는 난논 교수가 실험에 대해 펜으로 설명해 놓은 흔적이 있었다.

“ 이 약은 달뿌리 풀을 티보 잎과 접종하여 나온 술을 가공한 것, 실험대로 라면 이것을 사람이 복용할 경우 피부로 숨을 쉴수 있게되며 물속에서 열 배 이상의 시간동안 숨을 참을 수가 있다. ”

휘미는 다른 테이블로 옮겨갔다.

“ 이 액체는 공기와 결합하는 순간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지만 조금이라도 마찰이나 압력을 가할 경우에는 엄청난 폭발이 일어날 것이다. 매우 위험한 물질이기 때문에 시험관 밖에 세겹으로 밀봉을 하고 강철로 된 보존기를 덮어씌워 놓았다. 함부로 처리하기 힘든 물건인데 어떻게 하지? ”

휘미는 테이블을 전부 둘러 보는 동안 놀라움이 가시지 않았다. 저번에 나스치와 함께 이야기 했던 힘이 강해지게 하는 약 뿐만 아니라, 피부에 바르면 불속에서도 전혀 뜨겁지 않게 하는 약, 바닥에 붓는 순간 굳어버려 돌로 변하는 약, 바르면 매우 미끄럽게 만드는 약 등등 휘미가 기대한 이상의 놀라운 실험물들이 있었다. 그가 대부분의 테이블을 다 둘러 본 뒤 돌아가려고 하던 참이었다. 연구실 맨 구석에 이제까지 보던 것들과는 전혀 다르게 생긴 이상한 도구가 놓여있었다. 재질을 알 수 없는 세 갈래로 뻗어진 커다랗고 날카로운 기둥위에는 머리 크기만한 금속 구슬이 달려 있었고 아래에는 수없이 많은 시험관들이 서로 호스로 연결 되어 있었다. 아마 여러 용액들을 혼합을 시키는 기구인듯 했다.
“ 이건 처음 보는데. ”
휘미는 커다란 혼합 도구를 살펴 본 뒤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 휘미! 임마! ”
“ 미안 너무 늦었네. ”
휘미가 도착하자 초조하게 발을 구르던 나스치는 곧장 연구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휘미는 수십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가 직접 고급 연금술 실험물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난논교수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었지만 그래도 휘미가 배우던 기초적인 연금술 실험이나 책에서만 보던 이론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인것 같았다.
‘ 만약 힘이 세어지는 약 같은것이 세상에 보급된다면? ’
그런 약을 먹고 나쁜짓을 하는 사람도 생길 것이고 비싼 돈으로 팔기도 할 것이다. 그 약을 얻기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도 생길것이다. 분명 문제는 어떻게든 생긴다는 것을 휘미는 짐작으로 알 수 있었다. 물론 정말 그런 이유 때문에 난논 교수도 공개하기를 꺼려하고 다른 교수들도 이런 연구방법을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입에 담지 않는 건지는 모를 일이었다.
‘청단월때는 더 신기한 능력을 가진 풀들도 필 텐데’
휘미는 멍하니 빈 낭하를 바라보며 상상했다. 그가 만약 엄청난 풀을 캘 지라도 그것을 교수들이 알면 분명 압수할 것이다. 그렇다고 몰래 캐내어 숨길 수도 없다. 몰래 캔다고 해도 아나들 과 전부 한패인 조 대원들의 눈을 무슨 수로 피할 것인가.
휘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그의 눈에 낭하의 구부러진 길을 따라 천천히 다가오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 맙소사 ’ 그림자는 분명 난논 교수의 연구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휘미는 일단 연구실 쪽으로 뛰어갔다.
“ 나스치! 얼른나와! ”
그러나 휘미의 목소리를 들은 메지만이 연구실 쪽으로 허겁지겁 뛰어올 뿐이었다. 반응이 없자 메지도 뒤에서 소리쳤다.
“ 나스치! ”
그제서야 부서지는 소리가 나면서 나스치가 얼빠진 얼굴로 나타났다.
“ 빨리나와! 누군가 오고 있어. ”
그는 화들짝 놀라 문밖으로 뛰쳐나왔다. 일행은 그대로 뛰어가려다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 아참 문! ”
나스치는 떨리는 손으로 연구실문을 잠그기 시작했다. 그는 메지에게 왼손에 꼭 쥐고 있던 뚜껑이 밀봉된 잉크통 같은 작은 병 하나를 재빨리 내밀었다.
“ 이거 뭐야? ”
“ 잠깐만 가지고 있어봐. ”
나스치는 떠밀듯 병을 맡기더니 온몸을 사용해 문을 잠그려고 애썼다. 그러나 당황했는지 손은 경련이 난듯 떨렸고 걸쇄는 잠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휘미는 식은땀이 나는것을 느끼며 말했다.
“ 안되겠어! 일단 돌아가자. 이미 문이 따져있었다고 하면 될 거야. ”
휘미의 말과 동시에 낭하 가까이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스치는 놀란 나머지 펜을 문 안쪽으로 떨어뜨려버렸다. 일행은 기겁하여 입을 벌린 채 나스치를 쳐다봤고 그는 얼른 문 안으로 들어가 펜을 찾으며 말했다.
“ 먼저 가! 안에서 잠그고 숨어있...!! ”
휘미와 메지는 그를 향해 뭐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발걸음 소리가 지척인 것을 느끼자 어쩔 수 없이 반대편 낭하를 향해 달렸다. 두 학생은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나스치는 이미 안에서 연구실 문을 잠근 뒤였다.

두 학생은 안전한 곳에 다다르자 주저앉았다. 잠시 숨을 고른 뒤 메지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 아무 이상 없겠지? ”
휘미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 당연하지. 분명 귀신같이 숨어있다가 뛰쳐나와서 우릴 놀라게 만들 거야. 아니면 지금 벌써 나왔을지도. ”
메지는 휘미의 말에 안심이 되는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둘은 허기를 느끼고는 본관 밖으로 향했다. 하늘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으나 묵월기 마지막날의 다이지 캠퍼스는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학생들로 더 활기를 띠고 있었다.
흥분과 긴장이 슬슬 가라앉자 메지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 믿기지가 않는걸. 난 오늘 본 게 지금까지 배운 어떤것 보다도 훨씬 값어치가 있었어. ”
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 이런 엄청난것들이 있으면서 왜 다들 가르쳐주지 않는거지? 나스치만 잘 돌아온다면 오늘의 선택은 최고가 될거야. 맞다. 그런데 아까 있던거 중에... ”
휘미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문을 줄였고 메지는 그런 휘미를 보며 말했다.
“ 혹시 너도 봤어? ”
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맨 구석에 있었던 둥그런 구가 높이 매달려 있고 호스가 잔뜩 연결되어 있던 기괴하고 커다란 실험기계를 말하고 있는것이 분명했다. 휘미는 말했다.
“ 그건 뭐에 쓰는 기계일까. ”
메지가 대답했다.
“ 글쌔. 새로운 기계던데. 뭔지는 잘 모르겠어 ”
휘미는 머리를 긁적였다.
두 학생은 대화를 중단하고 서로 생각에 잠긴 채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중에 메지는 갑자기 생각난듯 품속에서 시험관을 꺼냈다.
“ 나스치가 아까 준건데. ”
병안에는 탁한 적갈색 액체가 가득 담겨 있었다. 두 학생은 한참을 바라보다가 주변의 시선을 느끼고는 다시 집어넣었다.
“ 나는 나스치가 평소에도 시험관을 가지고 다닐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는 생각 안하는데. ”
휘미가 말하자 메지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 휴. 미치겠네. 그럼 분명 연구실 안에서 가지고 나온거란 얘긴데. ”
휘미가 화를 내며 말했다.
“ 도대체 겁이 없는 놈이네! 어쩌려고 이건 또 훔친거야. 만약 걸리기라도 하면 정말. ”
메지도 고개를 끄덕였다. 매사에 걱정이 없는 그도 이번에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나스치녀석 나오기만 하면 이번엔 단단히 항의를 해야겠어. 아슬아슬하게 사는것도 재밌긴 하지만 솔직히 이번엔 정말 도가 지나쳤다고 봐. 난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그것에 대한 대가가 그보다 클 경우엔 안하는게 현명하다고 보거든. ”
메지는 병을 주머니 깊숙한 곳에 푹 쑤셔넣었다.
해는 이제 완전히 사라졌고 묵월기의 마지막날 밤은 검은 기운을 마음껏 뿜어내고 있었다. 두 학생은 나스치를 기다리기로 했다. 어차피 본관에서 밖으로 나오는 길은 하나기 때문에 본관 앞에서 기다릴 경우 어떻게든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메지는 틈날 때마다 시계를 쳐다보며 걱정스러운 눈길로 어두운 낭하를 바라보았다. 휘미는 벤치에서 팔짱을 끼고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 뭐야! ”

갑자기 귀청이 터질 것 같이 커다랗고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고 두 학생은 벌떡 일어나 버렸다. 그들의 앞에는 체루디가 으르렁거리며 서 있었다.
“ 치사하게 나 혼자 빼고 어디 갔었어. 어? 나스치 오빠는 안 보이는데? 빨리 말 안해주면 혼내줄테다! ”
메지는 난처한 표정으로 체루디를 바라봤고 휘미가 말했다.
“ 난논 교수님을 뵈러 갔는데 안 계셔서 우린 먼저 왔어. 나스치는 아마 아직 교수님하고 같이 있을 거야. ”
“ 쳇 그럼 혼자 교수님한테 갔었다는 거야? ”
체루디는 뾰로통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그러더니 나란히 벤치 옆에 앉아 나스치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휘미와 메지는 저마다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낭하를 바라보았다. 체루디는 묵월기인데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품을 몇 번 하고는 잠들어버렸고 시간은 어느새 오후 8시를 넘어갔다. 본관에 남아있던 학생들도 서서히 기숙사로 돌아갔고 교수들도 대부분 퇴근했다. 휘미는 팔짱을 낀 채 어두워진 낭하를 바라보다가 메지의 수첩을 빌려서 그가 정리한 내용을 공부하였다. 저녁 10시가 지나자 문을 단속하러 나온 본관 관리자가 셋의 어깨를 짚었다.
“ 벌써 나가 버렸겠지 뭐. 가자. 우릴 못 본 채 나간게 분명해. ”
다시 정신이 또랑또랑해진 체루디가 말했다. 휘미와 메지는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크게 걱정이 들진 않았다.

청단월

『특정 달의 31일. 단월의 주기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복잡하다. 만약 나타난다면, 단월은 무조건 그 월기의 마지막 날인 31일에 나타난다. 단월은 20～30분 정도 잠깐 짧은 시간 고개를 내밀다가 없어지는 달로 청색의 단월은 많아야 1년에 두세 번 정도 모습을 드러낸다. 청단월이 뜨면 신체적 능력이 극도로 올라가게 되며 밖에 나가 있을 경우 웬만한 아픈 곳은 거의 치유된다. 그리고 청단월이 뜨는 잠깐 동안에는 연금술에 사용되는 갖가지 희귀한 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채집도구를 들고 산을 오른다.』

“ 이거 좀 보통일이 아닌데? ”
“ 무슨일? ”
메지가 겁먹은 표정으로 말하자 체루디가 바로 물었다. 역시 대답한 것은 휘미였다.
“ 나스치는 원래 이 수업 잘 안 들어오잖아. ”
일행은 텅 빈 나스치의 지리학 강의실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메지가 다시 말했다.
“ 그래도, 어제 그런 일이 있은 후인데, 돌아오자마자 우릴 만나는 게 당연 한거 아닌가? ”
체루디가 또 끼어들었다.
“ 그런일? 뭐야! 어제 무슨일 있었지? 교수님을 뵈러갔는데 왜 나스치 오빠가 사라져. 교수님이 납치라도 했대?”
휘미가 부정을 하지 않자 체루디는 입술을 씰룩였다. 메지는 소리 내어 한숨을 쉬고는 어제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이야기 했다. 체루디는 난논 교수에 대해 잘 몰랐던 탓에 나스치의 행방 보다는 그의 실험실에 대해 더 자세히 듣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메지는 그 부분을 자세히 말할 기분이 아니었다. 이야기를 대강 마치자 휘미가 한마디 덧붙였다.
“ 터놓고, 만약에 나스치가 걸렸어도 징계를 먹거나 혼나던가 해서 돌아는 왔을 거 아니니. 그리고 난논교수의 성격상 나스치를 교칙 위반 같은 걸로 징계위원회에 넘길 사람도 아니야. 꿀밤한데 줬으면 그만이지. 근데 이게 어떻게 된 거야. ”
체루디는 나스치의 기숙사 후배를 알고 있다며 지금당장 그를 찾아보자고 했다. 휘미가 다시 강력한 어조로 말했다.
“ 좋아 일단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 기숙사 후배를 찾아보는 걸로 하고, 아 메지! 그렇게 눈만 크게 뜨고 있으면 어떻게 해. 제발 과민반응 하지마. 워낙 제멋대로인 녀석이니 자기 방에서 자고 있느라 수업에 안 나오는 걸 수도 있고 우리한테 미안해서 지금 피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바뀌지 않는 사실은, 이따가 그요네 산에 오르기 전까지는 무조건 그 익살맞은 얼굴을 내밀거란 거지. ”
휘미의 마지막 말에는 다들 수긍하는 듯 했다. 체루디가 뭐라고 크게 말하려고 숨을 들이켰을 때였다.
메지의 어깨에 갑자기 가늘고 새하얀 손이 척 올려졌다. 메지의 눈빛은 처음엔 놀라있었지만 점점 심술궂게 변했고 일행은 아무런 말없이 메지 뒤의 사람을 보고 있었다. 메지는 사악한 미소를 짓더니 휙 돌아 대상의 양 팔을 붙잡았다.

“ 나스치! 이 … 어라? 아니. ”

메지는 불에 대인 것처럼 잡았던 팔을 엄청난 속도로 놓았다 그의 얼굴은 뺨이라도 맞은듯 새빨개졌다. 쥬디하였다.
쥬디하는 옅은 미소만 지은 채로 고개를 갸우뚱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웃으며 말했다.

“ 나보고 뭐라고? ”

“ 어, 아니. ”

“ 너무했어~ 어머 근데 시계 예쁘다. ”

“ 응... ”

쥬디하는 원래는 나스치가 앉아 있어야 했을 자리에 털썩 앉고는 팔을 의자 기둥에 대고 일행을 쳐다보았다. 체루디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 쥬디언니! 언니! 이 남자들 알아요? ”

체루디의 말에 더 놀란것은 휘미와 메지였다. 둘은 체루디가 쥬디하를 마치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인 것처럼 말한다는것이 너무 신기했다. 쥬디하는 특유의 매력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응? 당연히 알지~ 작년엔 실험도 같이했는걸. ”

“ 에이? 근데 저한테는 모르는척 했어요 ”

“ 웃겨. 네가 얘기를 안하잖니. ”

“ 아닌데. ”

휘미는 두 여학생의 대화를 지켜보다가 말했다.

“ 뭐야 둘이 기숙사 선후배라도 된다는 걸로 들리는데? ”

체루디는 휘미의 말은 무시한 채 쥬디하의 팔을 잡고 매달려 때를 썼다. 체루디가 못마땅한 일이 있으면 하는 행동이었다. 휘미는 쥬디하가 체루디를 때어내는걸 도와줬고 메지는 품속에서 가죽으로 된 정리노트를 꺼내어 겉표지를 입김으로 불고 옷소매로 닦았다.

휘미는 발버둥치는 체루디를 간신히 의자에 앉히고는 머리를 눌러서 못 빠져나가게 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 체루디 기숙사선배가 쥬디하인줄은 꿈에도 몰랐네. 도대체 왜 수업시간엔 둘이 아는 척도 안하는 거야? ”

쥬디하는 메지에게 노트를 받아서 보면서 말했다.

“ 체루디가 나를 별로 안좋아하나봐. ”

“ 아니에요! 언니랑 같이 있는 그 나쁜 계집애 때문… ”

휘미는 체루디가 고함수준으로 소리지르자 아예 입을 막아버렸다. 메지는 그제야 쥬디하에게 말했다.

“ 잘 보고 나중에 꼭 갖다 줘. ”

“ 정말 고마워~ 근데 미안해서 어떡하니. 나도 뭐 해줄 거 있을까? ”

쥬디하는 빤히 메지를 쳐다보았고 메지는 머릿속이 복잡해지자 휘미를 보았다. 휘미는 아직까지 체루디에게 꼬집히며 힘싸움을 하느라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밝게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 도와줄 일은 뭐. 나중에 같이 놀러나 가자 ”

“ 그러자! 아무튼 고마워! 이거보고 나도 꼭 풀 찾아낼 거야.. ”

부를빙 교수가 무거운 지리모형 바구니를 들고 강의실에 등장하자 쥬디하는 자기 자리로 가버렸다. 체루디는 그제야 양손가득 움켜쥐고 있던 휘미의 머리카락을 놓았고 휘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쥬디하의 뒷모습을 보며 휘미가 흥분해서 말했다.
“ 맙소사 메지. 이건 진짜 놀라운 일이야. 쥬디하랑 이정도로? 이게 말이 돼? ”

“ 그러니까! 체루디만 아니었으면 더 잘 말할 수도 있었어. ”

얌전해진 체루디는 못 들은척 하며 하품을 했다. 휘미가 말했다.

“ 나중에 같이 놀기로 약속까지 하다니. 아나들 녀석이 알면 부러워 죽을 거야. ”

나스치의 후배를 찾아보겠다는 말은 모두 잊어버린 듯 수업이 끝난 뒤 이들은 아나들 일행과 만나기로 한 4시 반에 다시 집결하기로 약속하고 잠시 헤어졌다. 체루디야 1학년 끼리 행동해야 되니 그쪽으로 갈 것이고 나스치는 원래대로라면 정치학 수업을 듣고 4시 반에 모일 것이 분명했다. 휘미는 수사학을, 메지는 기계공학 강의를 들으러 갔다. 다들 쥬디하 때문인지 청단월 실험 때문인지 들떠서 나스치는 잊은 듯 했다.

이윽고 해가 서서히 서편으로 기울기 시작하고 청단월 현장학습의 집결시간은 30분 전으로 다가왔다. 광장에 도착한 휘미는 멀리 거만한 웃음을 터트리며 패거리들에게 둘러싸여있는 녀석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메지는 일찌감치 도착해서 아나들 패거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이 준 준비물을 점검하고 있었다.

“ 어이. 여기. ”

아나들은 휘미가 오는걸 보자마자 그에게 가방 하나를 집어던졌다. 휘미는 무표정하게 가방을 받아 메지 옆에 대충 던져놓고는 쭈그려 앉았다.

“ 어디보자?  집게, 무명 장갑도 들었고... 어 이건 뭐지? ”

메지는 가방 안에서 주먹 크기만한 등잔불을 꺼냈다. 위아래가 단단히 밀봉된 둥그런 등피 안에는 하얀 액체가 들어있었고 윗부분에는 나사모양의 작은 잠금장치가 되어있어서 그 잠금장치를 풀면 위에서 다른 액체가 떨어져 서로 섞이게끔 되어있었다.

“ 시가등 이네... 아나들놈, 이 비싼걸 ”

휘미가 반쯤 얼이 빠진 목소리로 말하자 아나들은 곁눈질로 그를 흘끗 보더니 씩 웃었다. 시가등을 개인 휴대용으로 만든 것은 매우 비싸다. 아주 작은 양으로도 눈이 부실정도의 빛을 내는 이 액체는 연금술 수업 시간에 휘미와 메지도 만든 적이 있는 물건이지만 이정도나 되는 양을 모으려면 재료값이 정말 비쌌을 것이었다. 휘미와 메지가 한참동안 시가등을 보며 신기해 하고 있자 아나들의 일행중 한명이 이들을 향해 물었다.

“ 근데 나스치인가? 그녀석은 안왔어? ”

그의 말에 휘미와 메지는 동시에 몸이 굳어버렸다. 메지는 자리에 벌떡 일어나서 해를 바라보았고 자기의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는 몇 번 더 그런 뒤 휘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휘미도 아무 말 없이 메지와 똑같은 얼굴로 서 있을 뿐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아나들이 이번엔 직접 물었다.

“ 그러게. 나스치는 왜이렇게 늦어? 출발하려면 이제 10분정도밖에 안남았는데. ”

휘미는 정말 오랜만에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장난치는 것이다 라고 속으로 수십번을 생각해 봤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메지는 이미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휘미가 떨리는 목소리로 메지를 향해 말을 꺼냈다.

“ 교수님께 말하자. ”

메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휘미는 가능한 침착해지려고 애쓰면서 메지에게 말했다.

“ 일단은 그냥 단순하게 나스치가 안왔는데요 라는 식으로 말해서 어떻게 된건지 눈치를 보자고. 만약 우리 잘못이 전부 들켰어도 솔직하게 얘기하면 되니까. ”

“ 메지 휘미 형. ”

그때 두 학생의 등 뒤로 나스치의 기숙사 후배인 어빕이 나타났다. 메지는 물론이고 휘미도 놀라 튕겨날 듯이 뒷걸음질을 쳤다. 어빕은 체루디와 비슷할 정도로 작은 키를 가지고 있었으며 기숙사선배인 나스치와는 대조적이게도 항상 졸려 보이는 얼굴에 느릿느릿한 말투를 썼다. 그는 특유의 졸린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두 학생이 이상한 행동을 취하자 놀라서 말했다.

“ 아니. 다들 왜 그래요? 내가 무슨 귀신이라도 되나. ”

어빕이 한발짝 다가가자 메지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 어빕 왠일이야? 나스치는 안오고. ”

“ 아까 나스치선배가 감기가 너무 심하다고. 의학과에 좀 갔다가 기숙사로 그냥 돌아간다고 했어요. 형들하고 같은 조라면서 알려주라고... ”

그러자 휘미가 축 늘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 뭐야. 그렇다고 청단월을 포기해? 아무튼 아무일도 없는건 확실하지? ”

“ 이럴줄 알고 있었지만 또 한바탕 걱정만 한 꼴이네. ”

메지도 다시 웃으며 어빕의 등을 두들겨주었다. 두 학생은 오랜만에 활짝 웃을 수 있었다.

5시가 되자 모든 학생들이 모였고 반장들의 지도에 따라 광장에 두 줄로 대열을 만들었다. 꽤 기다란 대열이 만들어졌다. 연금술과의 석좌교수인 기가마인 교수가 단상 위로 올라가서 다시 한 번 간단하게 주의사항을 말하고는 출발을 지시했다. 학생들은 제각기 청단월 풀에 대한 상상으로 들떠 있었다. 휘미와 메지는 즐거운 표정으로 서로를 이따금씩 바라보면서 나란히 이동했다.
“ 아무튼 다행이야...”

메지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휘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벌써부터 하늘을 보고 있었다.
긴 행렬을 이루며 다이지 동문을 빠져나온 다이지 2학년 행렬은 집행정이 있는 시가지 동편을 가로질러 그요네산 으로 향하고 있었다.

“ 저건 껍데기일 뿐이라고. ”

아나들은 반장 역할을 하면서 자기 조에도 신경을 쓰면서 주변의 여자들에게 이야기까지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가 아는 척을 하는 소리는 휘미의 귀에 매우 거슬리게 들려왔다.

“ 4명의 누군지도 모르는 집행자가 나눠서 나라를 다스리는 방식은 사핀이나 롯사르에는 없지. 우리나라와 뮤케넬만이 이래. ”

“ 집행정이라고 해봤자 진짜 집행자는 저기 집행정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않을거야. 자칫 잘못했다가는 집행자의 신분이 드러나 쫓겨날 테니까. 감춘다고 해도 쟁반을 들고 가던 한 시녀가 어머? 저 사람은 못보던 사람인데 어디서 일할까? 라고 하기만 해도 집행자는 바로 들켜서 신분 박탈이 되버릴테니까 하하”

아나들에게 붙들려 있는 순진하게 생긴 여학생은 아나들이 웃자 억지로 웃고 있었다.

“ 뭐 우리 아버지가 집행정의 기술 서기관 이라는 건 음, 너도 알고 있었나? 하하하. 아무튼 그것도 그렇지만 사실 사핀이나 록사르의 왕과 같은 존재인 집행자를 윔사람들은 아무도 못 알아본다는건 재밌는 일이지. 물론 이건 좀 과장이지만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옆집 아저씨가 사실은 집행자일수도 있는거고. 뭐 그럴 가능성 보다는 그분야의 실무를 보던 집행정 관리중에 하나가 집행자일 가능성이 좀 커. 그래서 난 가끔 우리 아버지가 집행자가 아닐까 생각도 해보는데. 아니면 네가 집행자일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하하. ”

허무맹랑한 이야기였지만 그렇다고 전혀 말도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휘미는 더 이상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풀 생각에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