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 어떡하지? ”

메지가 휘미한테 물었다. 휘미는 대답이 없었다. 그의 얼굴은 노랗게 변해 있었다. 메지는 휘미가 이렇게 당황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놀라 있었다. 그들 옆으로 학생 몇 명이 그냥 지나쳐 가는데도 두 학생은 깜짝 놀라 벽으로 바짝 달라붙었다.

메지는 휘미를 알고부터 항상 휘미랑 다니는 것이 즐거웠다. 휘미는 항상 판단을 잘 했으며 상황에 올바르게 대처할 줄 알았다. 물론 취향이 맞았고 자신에게는 없는 똑부러지는 성격도 마음에 들었지만 메지는 휘미에게 의지하는 점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휘미도 어쩌지 못할만큼 도가 지나쳐 있었다. 휘미가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하는 지금은 메지가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는 휘미에게 말했다.

“ 나스치의 메시지가 맞던 틀리던, 잠시 여길 떠나자. 누군가 우릴 골리려고 그러는 것일 수도 있고 우리가 너무 과하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휘미도 메지와 같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메지의 방이 가까워져 왔고 메지는 들어가서 재빨리 기본적인 물품만 주머니에다가 챙겼다. 소지금 얼마와, 그가 아끼던 손목시계를 찼다. 허겁지겁 짐을 챙기고 휘미의 방으로 이동하려던 찰나, 두 학생은 문 앞에서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누군가 문 밖에서 복도의 불빛을 가리고 있었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문밖이 온통 컴컴해질 정도로 많은 사람이었다. 그들은 문 앞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굳은 듯 서 있었으며 휘미와 메지가 문에서 서서히 물러나자 슬며시 몸을 움직였다. 그들이 움직이자 몸에 가려있던 불빛이 문안으로 새어나왔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했다.

메지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자신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휘미는 메지의 옷자락을 붙잡고는 소리를 내지 않고 창가 쪽으로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메지의 방은 창가 밑에 침대가 있었는데 두 학생은 신발도 벗지 않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때 문을 아주 작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혀 강압적이거나 급하지 않은 세기였다. 하지만 두 학생이 놀라기에는 충분했다. 메지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창문을 열고 창살을 옆으로 걷어내었다. 창문은 한 사람이 겨우 몸을 구부려야 통과할 정도의 크기였다. 두 학생은 손짓으로 순서를 정했고 휘미가 먼저 창문에 올랐다. 그가 반쯤 넘어갔을 때 아까보다는 좀 더 크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와 함께 휘미는 기숙사 창문을 빠져 나와 바닥을 밟았다.
순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판이 쪼개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와 동시에 바깥에서 매우 거칠게 문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메지는 있는 힘껏 창문을 밟고 최대한 몸을 숙여 밑으로 떨어졌다. 그가 떨어지면서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는 방문이 거세게 열리는 소리였다.

“ 이쪽! ”

휘미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메지에게 소리쳤고 메지는 있는힘껏 그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등을 돌려 방의 창문을 바라보자 어둠속에 가려진 둥그런 무언가가 목을 내밀고 있었고 메지와 쳐다보자마자 사라져버렸다. 쫒아올 것이 분명했다.

“ 어디로 가는 거야? ”

“ 나도몰라, 이제, 나스치가 맞았어. 청색빛, 안돼. ”

메지는 거칠어진 숨소리에서 나오는 휘미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휘미는 앞만 보고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고 메지는 그를 따라가기가 점점 벅차다는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등 뒤에서 서늘한 느낌이 오는것 같아 그는 자꾸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서쪽 언덕을 통해 다이지를 빠져나온 두 학생은 복잡한 윔의 밤거리를 달려 나갔다. 뛰어가던 두 학생 사이로 많은 사람들이 지나쳤다. 오래지 않아서 그들은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대로를 걷기에는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잠깐만 멈추자. ”

이렇게 죽어라고 뛰어본 적은 거의 몇 년 만에 처음이었기 때문에 두 학생의 다리는 이미 풀려 있었다. 휘미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멈추지 못했다. 그들은 불안을 견딜 수 없어 완전 녹초가 된 채로도 계속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틈날 때마다 뒤를 돌아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결국 이들은 한 주택의 담 사이 좁은 골목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메지는 머리끝까지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평소에 달리기 운동이라도 할 걸 후회가 들었다.
구름은 한층 더 두터워져 미월의 밝은 빛도 가릴 정도가 되었다. 휘미가 숨을 헐떡이며 미심쩍게 하늘을 올려보았고, 때마침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메지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 미월에 비? ”

이들은 숨을 고른 뒤에도 계속 벽에 기대어 있었다. 벽을 따라 내려온 빗줄기가 그들의 등을 적시고서야 그들은 등을 때고 몸을 일으켰다. 등불하나 비추지 않는 골목은 사방이 어둑했고 누구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다이지 캠퍼스가 아니면 큰 대로변만 다니던 이들에게는 매우 낯선 곳이었다. 간신히 생각을 가다듬은 휘미가 얘기를 꺼냈다.

“ 일단 윔에서 멀리 벗어나자. ”

메지는 다이지는 어떡하고? 라는 말을 하려다가 아까의 광경을 생각하고는 말을 삼켰다. 지금도 바깥에서는 그들을 잡으려고 혈안이 돼 있을지 모른다. 메지는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 근데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어? ”

휘미는 한숨을 쉬었다. 어떤 일 때문 인지라도 알면 속이 시원할 판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지금 아는 것은 누군가 그들을 잡으려 하고 있고 나스치의 말대로라면 그들은 아마 두 학생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뿐이다.
휘미는 문득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풀을 생각했다. 그는 손을 주머니에 넣어 풀을 찾았다. 다행히도 풀은 잘 있었다. 그는 풀을 꺼내어 손앞에 들어보았다. 메지는 휘미가 허공에 손을 뻗고 있자 무얼 하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휘미는 빗방울이 투명한 물체에 부딪혀 주변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 설마 진짜 이것 때문인가? 망할, 정말 이것때문이라고?! ”

메지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멀리서 사람들의 실루엣 비슷한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두 학생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마에 엉겨 붙은 머리칼이 시아를 가렸지만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이들은 무조건 서쪽 성문으로 향했다. 그요네 산 안으로 들어가면 아무도 못 찾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 저기다! ”

아무래도 이들을 뒤쫓는 자들은 단련이 잘 되 있는 듯 했다. 두 학생이 정신없이 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달음질을 하는 뒤쪽 무리와의 거리는 점점 좁혀져 갔다. 빗방울은 점점 더 거세져 갔으며 비가오지 않았으면 얼굴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의 차이까지 좁혀졌다.

“ 제발! ”

두 학생은 멀리 보이는 서문을 확인하고는 골목을 빠져나와 서문광장 한가운데를 달려 나갔다. 어제만 해도 모병으로 시끌벅적하던 광장은 비가오자 조용해져 있었다. 메지의 숨소리는 거칠어지다 못해 이상해져있었다. 그는 점점 뒤쳐지기 시작했다. 그의 앞으로 휘미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휘미가 멈추자 메지도 앞으로 덩달아 엎어지듯 무릎을 꿇었다. 빗물에 옷이 흠뻑 젖었다. 휘미가 빗소리의 방해를 받으며 메지에게 외쳤다.

“ 닫혔어! 성문이 닫혀버렸어. ”

메지는 힘까지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주변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다만, 멀리 모병소만이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두 학생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모병소로 뛰어갔다.
모병소 안은 비를 피해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수많은 지원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휘미와 메지가 죽을상을 쓰며 비를 쫄딱 맞은 채 들어갔지만 누구도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두 학생은 사람들 사이를 마구 헤치고 최대한 깊숙이 들어갔다. 그때 누군가가 두 학생을 불렀다.

“ 거기. 이보게. 양식은 작성 했나? ”

누런 종이로 된 서류를 팔에 잔뜩 들고 있던 한 젊은 군인이었다. 두 학생이 가만히 있자 그는 귀찮다는듯 말했다.

“ 다 작성 했으면 얼른 들어가서 대열에 끼게. 지금 출발 할거니까. ”

젊은 군인은 모병소 안쪽의 문을 가리켰다.

“ 아... 저희는 그게 아니라. ”

휘미가 오해를 풀기위해 말하려고 했지만 그때 모병소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 누런 옷을입은 험상궃게 생긴 수많은 남자들이 들어왔다. 깜짝 놀란 메지가 휘미의 옷을 붙잡고 다그쳤다.

“ 어떻게 하지? ”

두 학생은 무조건 모병소 안쪽으로 깊숙하게 들어갔다. 다행히도 모병소 안은 매우 복잡하던 탓에 이들은 금방 사람들 사이에 묻혀버렸다. 더 이상 들어갈 곳이 없자 휘미는 입술을 깨물고는 메지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메지는 휘미가 무슨말을 할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두 학생은 곧장 모병소를 통과해 외부로 연결되는 문으로 향했다. 메지는 엉겁결에 뒤를 돌아보았고 뒤쪽에는 알지못할 소란이 발생해 있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는 문밖으로 달려갔다.

모병소 안쪽의 공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비를 맞으면서도 줄을 맞춘 채 서 있었다. 휘미와 메지가 머뭇거리면서 그곳으로 가려 하자 문 바로 옆의 의자에 커다란 우산을 세워놓고 앉아있던 자가 두 학생을 불렀다.

“ 지원서, 각서, 양도서 ”

그는 기계적으로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는 안경 뒤의 눈을 찡그리며 두 학생을 바라보았다. 휘미가 다짜고짜 말했다.

“ 저흰 없어요. ”

그러자 그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 작성해서 오게. 뭐하는 건가. ”

메지는 길게 늘여져 있는 줄을 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 그냥 들어가면 안될까요? 잠깐 ”

그러자 그자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두 학생을 잠시 쳐다보더니 다시 자신의 책상으로 얼굴을 가져갔다.

“ 허, 뭐, 좋을 대로. 지원서는 여기에 이름만 쓰면 되고, 각서는 여기를 눌러서 엄지손가락으로 도장을 찍으면 돼. 하지만 양도서는 방법이 없어. 양도서 없이 죽을 경우에는 유가족이 보상을 못 받는다. 괜찮겠지? ”

그는 버릇인 듯 안경 뒤로 눈을 찡그려 두 학생을 바라보았다. 휘미와 메지는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어서 줄을 서게. ”

공터에는 전후로 각 5보 좌우로 각 2보의 간격으로 사람들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 이들이 합류하자 채 1분도 되지 않아 모병 대열은 출발을 시작했다. 두 학생은 대열 마지막에 서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대열은 광장을 가로질러 윔의 사령청이 있는 남쪽으로 향했다.
휘미는 걷는 도중 멀리 누군가가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지만 이미 아무도 없었다.

미월은 오묘한 빛을 내며 윔의 하늘에 떠 있었다.

-1 막 끝-

제 2막 - 편자가 없어 말을 잃었네

적월
 「붉은 달. 6～10일. 만물에 변화가 생기게 하는 달. 거의 매일 비나 눈이 오고 안개와 구름이 짙게 낀다. 적월은 방랑과 여행자의 달이다. 감성을 자극하는 달이기도 하며 적월이 뜬 날은 소리가 다른 때보다 멀리 퍼진다.」

스니게치 북부-

대지는 숨결조차 얼어붙었다.
하얗게 펼쳐진 만년설의 설원은 전혀 움직임이 없다. 이곳의 기억들은 모두 새겨지지 못하고 사라지며 거친 눈보라만이 남아 지난날의 역동을 어루만질 뿐.
혹한의 추위와 눈보라가 눌러앉아 사방을 뿌연 빛으로 매우는 이곳, 바로 윔과 사핀의 국경지대인 스니게치다.

적월기간의 스니게치는 날씨 자체가 우울증에 걸려있는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차갑고 묵직한 공기와 하루 종일 빗발치는 눈보라, 그 외의 모든 것은 침묵에 사로잡혀 있다.
그나마 지원군이 오지 않았더라면 스니게치 북부에 몇 주 동안 눌러앉아 있던 윔의 제 1군단 ‘잿빛칼날’ 은 이대로 영원히 잠들어버렸을지도 모를 상태였다.

“ 할말이 없군 ”

1군단을 이끄는 군단장인 잔질은 숙영지 한가운데에 위치한 군단장 막사 앞에 우두커니 서서 중얼거렸다. 60이 다 되어가는 그의 머리카락에는 스니게치 눈보라의 도움 없이도 이미 하얀 서리가 내리고 있었다. 잔질의 양옆으로는 12개의 중대를 이끄는 그의 장교들이 털끝하나의 움직임도 없이 꼿꼿이 선 채 그를 꼭짓점으로 부채꼴을 이루듯 퍼져 있있다. 잔질은 오랫동안 전쟁터에 있으면서 얻은 그의 버릇대로 한쪽눈살을 찌푸린 채 반대쪽 눈에 힘을 주고는 저 멀리  당당히 걸어오고 있는 지원군의 사령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 사령관 로소줌입니다. 뵙게되서 영광입니다. ”

잔질은 사령관의 손을 잡는 대신 그의 상기된 얼굴을 잠시 동안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사령관이 당황스러워할 정도의 시간이 흐르기 직전에 가볍게 그의 손을 잡았다.

“ 잔질. 잿빛칼날의 군단장이오. 젊은 사령관. ”

군단장 막사안의 커다란 입식 지도는 수없이 많은 낙서로 지저분해져 있었다. 장교 하나가 새로운 지도를 펼치고는 지시봉을 조심스럽게 짚어가며 상황을 브리핑했다.

“ 스니게치성을 뺏긴지 정확히 1달이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사핀군은 우리의 첩보경로를 피해 안티크로니움 산맥 중앙을 넘어왔고, 스니게치성을 이틀 만에 차지했습니다. 이에 사령청의 지시로 남쪽 네이나와 윔에 흩어져 있던 병력을 소집하여 우리 제 1군단이 다시 편성되어 이곳으로 왔으며 지금까지 남하하려는 사핀군과 쑤운협곡에서 가벼운 힘싸움을 두차례 벌였으나 두 번 다 견제에 지나지 않은 공격이었습니다. ”

젊은 사령관은 자신감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잔질에게 말했다.

“ 상황은 알겠습니다. 저도 설명드리지요. 이번에 온 우리 지원군단은 윔의 시민과 동맹국민으로 이루어진 용병들입니다. 기병중대는 없으며 경무장 보병 4개중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로소줌은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했다는 듯이 매우 능숙하게 설명했다. 그는 기껏해야 27~8살정도밖에 안 돼 보였지만 얼굴은 자신감과 결의로 가득차 있었다.
잔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도를 계속 바라보았다. 로소줌은 잔질이 별다른 반응이 없자 잠시 눈치를 보더니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 그럼 우선 급한 대로 합류한 4개중대를 포함하는 형태로 숙영지 배치를 변경하도록 하겠습니다. 날씨를 고려하여 바깥의 참호와 울타리의 간격을 넓히지는 않고 중대간의 거리만 좁히겠습니다. ”

잔질은 로소줌과 시선은 마주치지 않고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로소줌은 잔질이 계속 말이 없자 또 말을 이었다.

“ 올 때 보니 바위에 고드름이 협곡 쪽으로 나 있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바람을 고려해 짐수레와 식량창고의 위치도 조정하겠습니다. ”

로소줌은 말을 마치고 잔질의 응답을 기다렸다. 잔질은 그 뒤에도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다가 기지개를 펴듯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 좋을대로 하시오. ”

잔질은 그대로 일어나 막사 깊숙한 곳에 있는 그의 집무 책상에 가서 앉았고 군단장이 가버리자 장교들도 모두 자리를 일어섰다. 로소줌은 다소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얼떨결에 같이 일어난 뒤 잔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로소줌은 그와 같이 온 네 명의 장교들 과 함께 묵묵히 숙영지 한가운데에 있는 연설장으로 향했다. 그의 장교들은 역시 그와 같이 젊거나 더 어려보였다. 새파랗게 젊은 로소줌이 지나가자 잿빛칼날의 병사들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흘끗흘끗 쳐다보다가 계급장을 보고는 얼른 경례를 붙였다.

“ 잔질같은 장군이 저렇게 소극적인 인물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의 표정을 보셨습니까? 마치 사령관님의 말씀에 놀란듯 보이더군요. ”

로소줌은 그 말을 한 장교를 꾸짖으면서도 속으로는 흐뭇해했다. 그가 생각한 자신의 미래를 위한 첫 번째 장은 매우 순조롭다고 생각했다.
그는 무소냐쇼즈 출신이다.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인재들을 최고의 정예군사로 양성하는곳.
그에게 비록 경험이라고는 변방의 첩보청에서 근무하다가 첩보청장의 힘을 빌려 승진한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아무리 전직 백인대장 출신으로 산전수전 다 겪었어도 체계적인 전술과 군사지식이 없는 잔질보다는 자신이 뛰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로소줌은 그렇기에 더 신중했고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겸손. 이는 수도 없이 되새기고 염두해 왔던 덕목이다. 그는 연설장 위에서 집합해 있는 자신의 군사들을 향해 잿빛칼날의 용맹과 잔질의 위대함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 ...항상 그랬듯이 4중대의 6소대는 인원을 점검하고 4중대장에게 보고토록 하고, 2중대 1소대는 숙영지 배열을, 1중대 1소대는 장비상황에 대해 1중대장에게 보고하시오. 나머지는 숙영지 배열이 끝날 때 까지 대기하도록.”

지명이 된 소대의 백인대장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로소줌에게 경례를 붙였다. 4개중대의 총 24개의 소대를 이끄는 백인대장들은 120명남짓 되는 각각의 소대에서 한명씩 선출된다. 백인대장은 각 소대를 책임지고 있는 소대장 역할을 하며 보통 소대에서 가장 강하고 군사적 지식이 풍부한 자가 선출된다. 특히 1중대의 1소대 백인대장은 군단에서 가장 우수한 전사가 맡게 되며 그는 다른 백인대장들의 대표 역할까지 맡게 되어 중대장격인 장교들과도 비슷한 권위를 행사할 수 있다.
로소줌의 군단에서는 추천과 지원을 통해 백인대장을 뽑은 상태지만 앞으로 전투를 치러나가다 보면 백인대장이 사망하거나 투표를 통해 바뀔 수도 있고 본인이 물러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잔질의 잿빛칼날 군단이야 오랫동안 군사들이 서로 호흡을 맞춰 왔기 때문에 백인대장들도 확실히 인정을 받은 진정한 실력자들이 맡고 있지만 로소줌의 군단은 아직 그러지 못하기 때문이다.

“ 한 달 넘게 사핀이 스니게치 성에서 꼼짝도 안하는 것은 우리쪽 지원군 따위는 얼마가 오든 무섭지 않다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

“ 스니게치성을 얻은 것으로 위머에까지 충분히 타격을 미칠 수 있으니까 서두르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

1중대장과 3중대장이 로소줌의 양옆에서 한 마디씩 하였다. 로소줌은 그의 칼자루를 어루만지며 멀리 실루엣처럼 희미하게 펼쳐진 쑤운 협곡을 바라보았다. 그는 곧게 허리를 편 채 협곡의 전투를 이끌고 있는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전쟁이라. 아직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 단어에 로소줌은 피가 끓었다. 그는 칼자루에 있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잿빛칼날 군단을 만난건 그에게 찾아온 일생의 첫번째 기회였다. 잔질은 늙었지만 잿빛칼날은 여전히 강력하다. 로소줌은 스니게치 성을 탈환하고 산맥 너머로 그들을 쫒아 사핀의 수도인 사유둠에서 강화를 받고있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을 하면서 입가에 살짝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고개를 살짝 저은 뒤 현실로 돌아와 사령관으로서 지어야 할 근엄하고 결의에 찬 표정으로 돌아왔다. 단월처럼 짧은 스니게치 북부의 낮이 저물어가자 장교들이 제각기 보고를 위해 새하얀 입김을 내며 사령관의 앞에 줄을 섰고 그는 그들을 데리고 군단장 막사 안으로 향했다.

잔질은 금방 자고 일어 난 듯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사령관이 들어갔는데도 손에 들고 있던 보고문에서 눈을 때지 않았다. 로소줌은 경례를 한 뒤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 군단장님. 숙영지 재배치와 군단 재편성을 마쳤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

로소줌은 잔질이 또다시 무응답으로 대꾸할 것을 감안하여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잔질은 이번에는 예상외로 그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대답했다.

“ 싸워야지. 하지만 그전에 먼저 녀석들이 올걸세 ”

잔질은 이미 결정지어진 것처럼 적군의 계획에 대해서 말해버렸고 로소줌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는 ‘그걸 어떻게?’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가까스로 참고는 말했다.

“ ...그럼 오늘부터 횃불 수를 늘리고 보초를 두배로 늘리겠습니다. ”

“ 그건 이미 내 부하들이 지시했을 것이오. ”

로소줌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잔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잔질은 매우 태평한 얼굴로 테이블에 깔린 지도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잔질이다. 아무리 로소줌 자신이 무소냐쇼즈 출신의 최고의 군인이라고 해도 그는 잿빛칼날의 모든 백인대장의 존경을 받는 자다.
자존심이 강하고 제멋대로인 잿빛칼날의 백인대장들에게 진심으로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그가 진정한 군단장이라는 것이었다. 로소줌은 거기까지 생각한 다음 잔질을 향해 깊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 그럼 알겠습니다. 언제든지 스니게치 성으로 쳐들어 갈 수 있게끔 단단히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

그러나 잔질은 이번에도 쉰 목소리로 느릿하게 말했다.

“ 성으로는 쳐들어가지 않을 것이오. ”

이번에는 로소줌도 그의 의도를 알아챘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회전을 유도할 생각이시군요. ”

잔질은 대답대신 그의 길다란 지시봉으로 지도의 한 곳을 짚었다. 지도에는 ‘스니게치 평원’ 이라고 쓰여 있었다.

로소줌은 막사의 천을 손으로 후려치며 바깥으로 나왔다. 눈보라는 그쳐 있었지만 바람은 살을 할퀴듯 차가웠다. 군단장 막사로 이어지는 길의 얼음을 때어내느라 병사들 몇 명이 둘러싸여 애를 쓰고 있었다. 로소줌은 바람 따위에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꼿꼿이 서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기다리고 있던 그의 네 장교들도 그를 따라 똑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붉은빛을 내는 달은 새카만 밤하늘 가운데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찌보면 따뜻하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한 모습이었다. 밤에 태양을 끄집어내어 똑바로 볼 수 있다면 저런 모습일까?  로소줌은 달을 똑바로 마주한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 이보시오!!! 대장. 아니? 사령관!!! 우리는 다이지 출신으로... ”

눈보라와 바람소리 사이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억양으로 보아 윔 출신으로 생각되는 지원부대의 경보병 두명이 사령관 앞까지 뛰어가 무언가 말을 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주변의 병사들로 인해 진로가 막혀버렸다. 로소줌은 그의 사색을 방해한 것에 화가 치밀었지만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계속 달을 주시했다.

“ 사령관!!! 제발 우리를 돌아 가게 해주십시오. 새로운 방법을... ”

두 병사는 다시 소리쳤고 로소줌 옆에 있던 장교 하나가 보다 못해 그들에게 갔다.

“ 경보병들. 이게 무슨소란인가. 나한테 얘기해보게. ”

발버둥치는 두 병사를 뒤에서 껴안고 있던 다른 병사들이 그들을 놔주자 두 경보병은 기침을 몇 번 한 뒤 이야기했다.

“ 우리는 다이지 출신이며 칼을 쓰는 법을 전혀 모르지만 만약 돌아가게만 해준다면... ”

“ 위머의 다이지? ”

장교는 무소냐쇼즈 근처에 있던 빛을 내는 커다란 탑을 생각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곳은 전쟁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윔의 학자들이 사는 곳이다. 그는 두 병사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 했다.

“ 이보게. 그곳 사람들이 여기에 왜 와있겠나. 그리고 돌아가는 방법은 죽거나, 죽을만큼 부상 당하는 방법밖에 없네. 그리고 자네들의 지금 행동은 군법에 크게 어긋나는 행동이네. 이번만 봐 줄테니 어서 소대로 돌아가게 ”

장교는 다시 병사들에게 그들을 끌고 가라고 손짓 한 뒤 사령관의 근처로 돌아왔다. 멀리서 두 병사가 고함치는 소리가 적월의 기운을 타고 멀리까지 뻗쳤다.

“ 칼은 피를 먹어야 날이 살지. 그러니 내거엔 근처에도 가지 않는게 좋을 거야. 요즘 너무 굶었거든. ”

1중대의 2소대 경보병 기삭은 오래된 가죽으로 겹겹이 묶어놓은 자신의 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넓은 어깨와 다부진 근육, 약간 그을린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해 보였다. 반대편에 있던 싯딜이 반쯤 풀린눈으로 대꾸했다.

“ 피는 살기가 있어야 빨아들일 수 있는거야. 살기가 없으면 피는 달아난다. 자기 피도 함께 가지고. ”

싯딜은 그러면서 막사의 기둥에 기대다가 갑자기 기삭의 눈을 노려보았다. 기삭은 무표정하게 그의 시선을 받아주면서 칼집을 둥글게 돌리다가 갑자기 손잡이를 꽉 잡았다. 잠깐 정적이 흐르는 듯 했지만 멀리 막사 구석에서 들려온 쉰 목소리로 인해 깨져버렸다.

“ 치기어린 살기. 시간이 지나면 금방 시들어버리는. ”

구석에서 등을 돌린 채 윔군의 겨울 군화인 다로기의 가죽을 두드리고 있던 자의 말이었다. 그는 천천히 그리고 능숙하게 상처투성이인 커다란 주먹으로 가죽을 두드리고 있었다. 몸은 구부정했고 머리숱은 듬성듬성했지만 그는 목소리 하나만으로 막사안의 시선을 전부 휘어잡았다. 막사는 조용해졌고 그가 가죽을 두들기는 소리만이 심장박동 소리처럼 규칙적으로 막사안에 둔탁하게 퍼졌다. 그는 몇 번 더 다로기를 두들긴 뒤 고개를 뒤로 돌렸다. 의외로 험상궂은 인상은 아니었다. 선하다고는 말 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깊게 고뇌하고 있는 듯한 중년의 남자 얼굴이었다. 그는 소대원들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 살기에 홀린 애송이의 눈은 시간이 금방 풀어준다. 한이 맺힌 자의 눈만이 오직 피로 풀어 줄 수 있는법, 함부로 피맛을 찾으려고 하지 마라. ”

막사는 엄숙해졌고 그때까지 서로를 노려보던 기삭과 싯딜은 동시에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기삭은 칼을 아무렇게나 내던진 뒤 모포에 누워버렸고 싯딜은 자기 소대의 백인대장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때 갑자기 막사 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두 경보병이 떠밀리듯 들어왔다. 경보병은 옷에 달라붙은 눈을 때어내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문쪽에 제일 가까이 있던 으롬이 낄낄거리며 소리쳤다.

“ 내 그럴줄 알았다. 불쌍한 쇠팔찌 녀석들... ”

“ 그래도 울타리 바깥으로 안쫓겨난게 다행이지. 쫓겨났다간 얼어죽기도 전에 사미잇이 물어갈꺼야 ”

휘미는 엎드린 채 한참 기침을 하고는 자기 자리로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 무쇼냐쇼즈 놈들! ”

휘미는 말을 마치더니 다시 기침을 해 대었고 휘미는 문앞에서 한숨을 푹푹 쉬며 움직이지 않았다. 싯딜이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 그 쇠팔찌를 보여주면 되잖아? 상징이라며. ”

“ 다 소용없어. ”

메지는 아무 말 없이 불쪽으로 몸을 파고들어 떨리는 손을 녹였다. 지난 몇주동안 군에 온 뒤로 메지의 얼굴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눈이 쑥 들어갈 정도로 살이 빠졌으며 얼굴엔 피로가 찌들어 있었고 모자를 삐져나온 머리카락은 생기가 없었다. 기삭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어쩔 수 없어. 그냥 여기서 적응해야지. 낙오당하지 않게만 하라고. 전투시에 방해만 안시키면 뭐라고 할 사람은 없으니까. 설마 죽기야 하겠어? ”

기삭은 분명 무관심한 어투로 말했지만 그의 말은 분명 뼈가 있었다. 그들로 인해 전투시에 소대원들에게 방해가 될 경우에는 제약이 가해질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 어느 군대에서든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했다.

“ 그러려면 전투 때는 그 쇠팔찌를 벗는 게 좋을 거야. 몸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여야지 도망가기 편하지. ”

소대원 하나가 비꼬듯이 두 학생에게 말했고 소대에 나직한 웃음이 흘렀다. 하지만 이젠 익숙해진 터라 두 학생은 털끝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나마 이제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소대원들이 두 학생을 진심으로 동정하고 있었다. 물론 처음에는 모두가 노골적으로 그들을 싫어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