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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학생이 성문의 징병소에서 행렬을 따라 처음 도착한 곳은 윔의 군사훈련소였다. 이들은 훈련소에 도착하자마자 대열에서 빠져 이탈하려 했지만 갑자기 왠 병사들이 달려와 이들에게 칼을 들이 댄 것이다.

“ 벌써부터 탈영하려고? ”

휘미가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고 사정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전부 같은 대답이었다.

“ 서약서에 서명을 한 이상 어쩔 수 없네. 이건 군대의 기본이므로 정말 어쩔 수가 없어. 들어오는건 자유지만 나가는 것은 그렇지 않아. 너희 둘 때문에 규칙을 깨트릴 수는 없지. 기간을 채우거나, 전쟁이 끝나거나, 군단이 전멸을 당하거나, 죽거나 이 네가지중에 하나라도 빨리 이루어지도록 기도해봐. ”

두 학생은 바닥에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다.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몸안의 모든 힘이 빨려나가는 느낌뿐이었다.

‘하루아침에 학생에서 군인이 되다니’

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원자들은 여러 번 용병의 경험이 있거나 폴리스나 경비대 출신자 등 충분한 훈련을 통해 단련이 된 자들이었다. 하지만 운동이라고는 언덕계단을 오르는 것 밖에 하지 않았던 두 학생에게 훈련소에서의 생활은 악몽 그 자체였다. 이미 이런 훈련에 익숙한 용병들 중엔 지루한 표정을 짓는 자도 많았지만 두 학생은 첫날부터 거품을 물고 연병장 한가운데에 쓰러져 버렸고 실제 전투훈련을 할 때쯤에는 그 전에 한 준비운동으로 팔이 마비되어 칼을 들고 있는 것조차 고문이었다. 두 학생은 어떻게든 사정을 얘기해 보려고 했지만 적응을 못하면 못할수록 훈련교관은 물론 주변 동료들의 시선만 더욱 따가워졌다.
문제는, 신임병 훈련을 4주간 다 받고 나왔으면 그나마 다행이었겠지만 스니게치성인 함락되는 등 사태가 긴급해지자 사령청은 두 학생이 속한 제대의 훈련을 1주만에 몰아서 마쳐버린 것에 있었다. 어차피 뼈가 굳은 용병들로 이루어진 군단이기 때문에 기본훈련은 크게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들은 바로 전방으로 향하는 지원 군단에 편성되었고 곧바로 스니게치에 있는 잿빛칼날을 향해 파견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도 다행히 살아갈 방법을 찾게 되었다. 곧바로 이어진 행군에 지쳐 쓰러질 지경이 되자 두 학생은 거의 본능적으로 풀들을 뽑아 먹었고 일부는 소대원들을 나눠 주었다.

“ 난 쇠팔찌 친구들이 좋아. 너희가 뽑아주는 풀을 먹으면 온몸이 나긋해져. 3개월전 마지막으로 품었던 여자가 생각나는군. ”

“ 몸도 좋아지니 아껴서 먹으라고. ”

두 학생이 간단한 약초들로 실력을 내자 소대원들도 이들을 조금씩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니게치에 다다를 때쯤에는 소대의 백인대장도 이들을 불쌍히 여겨 상부구조에 대해 귀띰해 주었고 두 학생은 무작정 사령관 앞으로 달려갔던 것이었다.

2소대의 백인대장은 다로기를 신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 그렇게 사령관 앞으로 달려드는걸 보면 담력은 있는 친구들이군. 멍청한건 아니랬으니. ”

휘미는 그의 말을 듣고는 언짢은 표정으로 잎사귀 하나를 입에 넣고는 수통의 물을 마셨다. 옆에 있던 소대원이 휘미에게 말했다.

“ 이봐 휘미. 나도 언제 풀 찾는법좀 알려줘. 어때? 소대원들 다같이 찾는게 좋겠군. 우린 칼쓰는 법을 좀 알려주면 되니까. ”

그러자 반대편에 있던 대원이 껄껄 웃었다.

“ 자네 뭔가 착각하는군. 여긴 잿빛칼날 군단이야. 이 추위에 소대원들 전체가 풀을 찾는답시고 두리번거리면 우리가 토끼인줄 알거야. 대장님이 조롱당하는 꼴을 보고싶어서 그래? ”

그러자 잠잠히 있던 휘미가 말했다.

“ 지금까지 뽑은 풀들은 아무것도 아니야. 길로만 다닌 탓에 끝내주는 놈들은커녕 쓸 만하다 싶은 것들도 아직 전혀 못 찾았어. ”

“ 보라고. 쇠팔찌 친구들은 뭔가 다르다니까. ”

“ 정말 끝내주는 놈이 있단 말이지? 먹으면 여자를 한방에 가게할 그런놈이? ”

소대는 다시 시끌벅적 해졌고 휘미는 그제야 억지로 웃으며 메지 옆에 가서 주저앉았다. 바로그때 전령 하나가 와서 막사문을 열어젖혔다.

“ 인원점검 및 행동지시가 있다고 합니다. 소대원들은 연설장으로. 백인대장은 해당 장교막사 앞으로 와주십시오. ”

“ 가자! ”

소대가 한꺼번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 어쩔수 없겠어. ”

메지가 휘미에게 속삭였다. 휘미는 바람에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모습도 메지와 사정이 그리 다르지 않았다. 눈빛은 여전히 반짝였지만 얼굴은 생기가 없었고 몸은 지쳐 굳어져 있었다. 그는 언 입술을 빨며 말했다.

“ 전쟁이 일찍 끝나길 바라는 수밖에 없어. 우리 생각이 맞았어. 이놈들은 말이 통할 상대 아니야. ”

“ 잿빛칼날 쪽에는 기간만료로 귀대하는 자들이 있을 거야. 그에게 부탁해서 다이지에 편지라도 쓰는게 어떨까?”

메지는 자신이 그렇게 말하고는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의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이지는 물론이고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았다. 방법이 없었다. 무조건 혼자서 길을 극복해 나가야만 했다.

“ 오늘부터는 갑옷을 입고 너널 위에다 다로기까지 신은채로 잠을 잔다! 보초는 4교대에서 2교대로 돌아간다. 다들 바짝 긴장해라! 적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

스니게치의 밤은 너무 가혹했다. 윔의 군인들에게는 사핀군이 여기보다 훨씬 더 추운 안티크로니움 산맥을 넘어 쳐들어왔다는 사실은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 사핀은 매일 날씨가 이러니까, 차라리 따뜻하게 만들면 힘을 못쓸거야. ”

“ 사핀도 따뜻한 지방이 있어. 내륙평야의 동우(凍雨)가 내리는 지역은 요지호에서 물을 길어다 밭도 간다. ”

지리학과 역사학시간에 사핀에 대해 공부할 수 있었던 메지는 가끔 이런 식으로 자신의 지식이 쓰이는 것이 뿌듯했다. 밤이 되어 보초를 서면서 그는 예전에 배워놓은 지식들을 최대한 현실로 끌어오는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 싯딜. 여기서 우리의 체온을 삼키는 건 눈보라가 아니야. 바람이지. 옷의 모든 구멍을 막으라고. 나처럼 바람이 통과하지 못하게. ”

눈보라를 피해 몸부림을 치는 싯딜에게 메지는 가져온 헝겊조각을 나눠주었다. 한참 뒤에야 진정한 싯딜은 메지와 발을 맞춰 걸으면서 말했다.

“ 추운건 정말 질색이다. 스니게치로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바다라면 모를까.”

“ 바다? 남쪽의 네이나 같은곳? ”

메지가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싯딜은 고개를 끄덕였다.

“ 네이나나 노체니, 모노불 같은 곳. 해적들을 쫒아 다니거나 사핀해군이 해안을 침범하는걸 막는거지. 발령이 잘 떨어져서 항구 경비대로 가면 밤에 한바탕 놀수도 있고. ”

메지는 뻑뻑한 눈동자를 굴렸다. 그는 울타리 옆으로 최대한 붙어 걸으며 싯딜의 얼굴을 보았다. 싯딜은 굉장한 미남이었다. 평소에는 무표정하고 냉랭한 얼굴을 항상 띄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의 얼굴을 강렬하게 남게 해주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꿈많은 청년의 얼굴 또한 희미하게 남아있다고 메지는 생각했다. 나이는 기껏해야 자신보다 두세살 많으려나? 메지는 자신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곳에서 살아온 싯딜을 경외하듯 쳐다보았다. 메지는 그에게 물었다.

“ 군에 몇 년 동안 있던거야. ”

싯딜은 손가락을 꼽아보았다.

“ 글쌔. 횟수로는 4번. 년수로는 5년째인가. 정확히 모르겠군. 기삭에게 물어봐. 녀석은 처음부터 나와 같이 있었으니까. ”

메지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싯딜은 고개를 저었다.

“ 오래한것도 아냐. 나를 빼고 절반이 5년은 넘게 있었다고 했다. 대장님은 올해가 17년째랬어. ”

“ 믿기지 않는군. 이기기만 했나보지? ”

“ 이긴적이 많으니까 살아있는거지. 하지만 최악의 경우도 있었어. ”

“ 예를들면? ”

“ 천명중에 열둘만 살아남았을 때. 물론 나를 빼고 ”

메지는 놀라기도 했지만 그의 어투가 더 신기했다.

“ 왜 자꾸 너를 빼고 계산하는건지 물어봐도 되나? ”

“ …나는 스스로에 대해 전부 알고 있으니 굳이 계산에 포함시킬 필요가 없지. ”

싯딜은 잠시 머뭇하다가 얼버무려 이야기했지만 메지는 싯딜의 얼굴에 두려움이 언뜻 스쳐가는것을 보았다. 전쟁과 관련된일에 자꾸 자신을 넣어 생각하는것을 꺼리는것 같군. 메지는 말을 할까 망설이다가 다른 말을 했다.

“ 확률이라는게 있어. 확률은 같은게 여러번 일어날수록 가능성이 작아져. 네가 한번 전쟁을 치뤘을 때 살아있을 확률이 10분의 9라고 해도 전쟁을 5번만 치루면 살아있을 확률은 2분의 1정도밖에 안돼. ”

“전쟁은 한번이다. 다만 전투가 수도없이 많을 뿐. 그리고 전쟁의 결과는 카지위가 정하는거지 확률이 정하는게 아냐. ”

“ 카지위? ”

메지는 낯설면서도 반가운 단어를 발음해 보았다. 싯딜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메지를 바라보았다.

“ 전쟁의 신. 검은횃불과 칼날혀의 카지위 말야. 학자라며 아케아의 토속신에 대해서도 모르나? ”

메지는 소리내서 웃었다.

“ 아니, 오랜만이라서. 나도 다이지에 가기 전에는 자주 썼었지.

빛휘장과 생명 잔의 마누챠
일곱 개 눈동자의 루나인
서리 숨결과 흰 눈물의 사메시아
흙바람과 돌외투의 닥시온
강노래와 숲피리의 에븐딜
검은횃불과 칼날혀의 카지위
발자국 그림자와 모닥불향기의 그-히시
꿈모자와 사랑바구니의 우미네데 

노래로도 외웠었는데... 또 뭐 빠진게 있던가? “

싯딜은 눈을 몇 번 껌뻑이다가 손뼉을 쳤다.

“ 구름수염과 천둥지팡이의 스티리쏘 ”

“ 맞아 ”

메지는 류히조 교수의 수업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즐거운 것도 잠시. 씁쓸한 기억에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싯딜은 그런 그를 바라보고는 입맛을 다시며 시선을 접었다.
싯딜은 다로기 위에 눈이 쌓이는 것이 거슬리는지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발을 눈바닥에 털었다. 하지만 땅위의 눈이 오히려 다로기에 더 들러붙었다. 그는 양발로 뛰기도 해보고 점프해서 양쪽발을 서로 부딪혀 보기도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또다시 시작된 싯딜의 몸부림을 무시하고 메지는 찬바람을 강제로 들이 삼켰다가 다시 하늘위로 내밷었다. 너무 추운 탓에 입김도 나오다가 얼어버리는것 같았다. 눈을 살짝 감자 온갖 피로와 고통, 알지 못할 불안감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고 현기증이 밀려왔다. 그는 걸음을 살짝 휘청거렸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주먹을 한번 꽉 쥐었다 폈다. 뻣뻣한 느낌과 손의 굳은살이 갈라진 상처가 번갈아 느껴졌다. 낯선 이 느낌. 펜을 잡을 때의 느낌과는 너무도 달랐다.

“ 이쪽으로 줄을 서. 오늘밤은 양고기를 푼다. 자, 잘들 보고 먹어. 언 부분을 물면 그대로 앞니가 나가니까. ”

본부 막사를 지나가자 잿빛칼날의 장교 하나가 부하들 몇 명과 함께 나뭇잎에 싼 고기를 근무자들에게 나눠주었다. 메지는 고기를 받자마자 입안에 가득 물었고 수통의 물도 같이 쏟아넣었다. 고기의 온기로 인해 수통의 물이 조금 데워져 입으로 들어왔다.

나팔소리가 울린 것은 그 즈음이었다.
너무도 침착하고 깊게 울리는 나팔소리에 메지는 처음에는 별 반응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싯딜은 소리가 나자마자 양고기를 입에 가득 넣은 채로 욕지거리를 마구 하더니 칼을 거꾸로 쥐고 미친 듯이 소대 막사로 뛰기 시작했다. 메지도 그걸 보고서야 양고기를 움켜쥔 채 덩달아 막사로 뛰었다.
나팔소리는 적의 존재를 알리는 경고였다. 고요하던 숙영지는 순식간에 모습이 바뀌었다. 횃불이 워낙 여기저기 사방에서 날아다니는 탓에 메지는 눈이 다 뒤집힐 지경이었다.
메지가 막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소대원들이 졸린 기색 하나 없이 무장을 마친 채 막사 앞에 줄을 맞춰 서 있었다. 이들의 2소대 백인대장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굴리다가 손가락을 우아하게 뻗어 정확하게 어둠속의 한 지점을 짚었다. 적의 칼날에 비추는 희끗희끗한 반사광이 모래알처럼 반짝거렸다.
중대기가 올라가자 장비들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각 소대들이 일사분란하게 모여들었고 다섯열로 줄을 맞춰 숙영지 울타리 밖으로 뛰어갔다.

“ 뭐야 제대로 포위하지도 못했네! ”

갑옷의 끈을 여미던 휘미의 옆에서 소대원 하나가 소리쳤다. 잘 보이진 않았지만 앞쪽에서는 이미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듯 하였다. 워낙 소음이 큰 탓에 그것이 전투하느라 나는 소린지 아군들의 이동소린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조금 있자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함성이 이전보다도 훨씬 더 커졌다. 분명 전투가 벌어졌다.

“ 올것이 왔구나. ”

두 학생은 다른 용병들과는 달리 자기의 무기가 없는 탓에 긴 투척용 창 하나와 나무에 대못을 박은 보급된 칼을 꼭 붙들고는 떠밀리듯 전투지를 향해 달려갔다. 첫 전투 경험지로는 정말 최악의 여건이었다. 무작정 앞을 따라 달려 나가던 두 학생이 옆에서 달려온 다른 복장의 군인들을 맞닥뜨린 것은 한순간이었다.
휘미는 얼떨결에 자기에게 날아오는 창을 몸을 틀어 피했다. 휘미가 그것이 사핀군의 창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가 사핀어 욕설 들었을 때였다.

“ 중대기로 모여! ”

“ 중대기로 모여! ”

“ 중대기로! ”

휘미는 거의 휩쓸리다 시피 움직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이미 그의 주변에는 같은 소대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너무도 빠르게 순간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리저리 떠밀리다 뒤로 쳐진 그는 지금까지 겪어왔던 그들중 가장 큰 난관에 부딪혔다.
그 눈은 자신의 것과 같은 종류였다.
하지만 좀 더 강렬했고 좀 더 욕망 적이었다.
그리고 그 눈은 정확하게 휘미의 눈동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모든 것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마치 먹이를 눈앞에 둔 짐승과 같다고 휘미는 생각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많은 것이 걸려 있었다. 그는 시선을 유지한 채로 휘미에게 달려들었다. 휘미는 온몸에 힘이 빠질것 같고 머릿속이 제어가 되지 않았다. 1초도 지나지 않아 휘미의 머리 바로 뒤까지 깊숙하게 칼날이 들어왔고 휘미는 겨우 배운대로 칼을들어 어정쩡한 자세로 그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하지만 사핀군은 휘미의 방어쯤은 예상했다는듯 튕겨나온 자신의 칼의 반동을 이용해 다시 그의 옆구리를 노렸다. 휘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자 눈을 감으며 몸을 최대한 낮춰버렸다. 거세게 들어온 칼날은 그의 깃털없는 모자 끝을 지나갔고 휘미가 고개를 살짝 들자 그는 다시 재차 칼을들고 휘미에게 달려들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휘미를 노리던 사핀군의 등뒤에서 비슷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나보다. 또다른 사핀군이 몸을 휘청이다가 뒤로 자빠지면서 휘미를 노리던 자의 등을 팔꿈치로 찍어버렸다. 깜짝놀란 그는 휘미에게 겨누던 칼을 멈추고 제대로 보지도 않고 칼을 뒤로 후려쳤다. 그리고 휘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 쇠팔찌! ”

그때 낮은 목소리와 함께 어둠속에서 날렵한 물체가 튀어나왔고 섬광이 한번 번뜩였다. 그와 동시에 휘미와 싸우던 사핀군은 비명한번 없이 그대로 눈바닥에 쓰러졌다. 어둠속의 칼날은 잠시도 쉬지 않고 바로 다음 타겟을 향해 갔고 휘미가 일어섰을 때는 이미 두 번째 타깃에서 칼을 빼낸 뒤였다.
휘미는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통성명은 하지 않았지만 같은 소대 대원이었다. 그는 휘미를 쳐다보지도 않고 곧바로 중대기를 향해 뛰었고 휘미도 정신을 차리고 그가 달려간 쪽으로 향했다.
휘미는 그에 대해 기억해 냈다. 많아야 서른 살 정도. 수염이 자란 상태여서 그렇지 말끔한 상태에서 보면 어떻게 보일지 모를 일이었다. 얼굴이 작고 몸집은 호리호리한 편이었지만 키가 컸으며 어깨가 매우 넓었다. 소대가 편성되면 으레 하기 마련인 자기의 경력을 자랑하는 자리에서도 그는 아무말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의 잘 다져진 체구에 경계심을 보이는 자도 있었지만 어차피 백인대장 자리 따위는 안중에 없는 것 같자 소대원들도 금방 그를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서 몇 명하고는 말을 붙인 것 같았지만 다들 그의 존재에 대해서 크게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휘미가 보기에도 그의 동작은 매우 훌륭했다. 가끔씩 소대원들이 몸을 푸는 것을 봤지만 아무도 저런 식으로 움직이지는 않았었다. 밤이어서 그런가? 휘미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는 중대기쪽으로 최대한 이동하였다.
이동하고 보니 중대기는 망루가 있는 낮은 산괴에 있었고 그곳에 다다르자 전황이 한눈에 보였다. 쓰러진 병사들이 군대군대 보였지만 적어도 서있는 사람들은 전부 윔의 군인들이었다.
휘미가 소대를 찾아 들어가자 대장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오고가고 있었다. 마치 방금 전의 전투는 별것 아니라는 듯 다들 어디서 식사라도 하고 나온듯한 편안한 표정이었다.

“ 별동대만 나와서 한번 견제해본 것이 분명해. 이렇게 빨리 빠진 것을 보면”

“ 죽은놈들 얼굴을 봐. 전부다 가로소에서 사온 야만인 용병들이야. ”

“ 병력도 파악할 겸 우리가 준비를 잘하고 있나 간을 본거지. ”

“ 발톱 때도 못 핥아보고 물러났으니 아마 다시 올 거야. ”

소대원들은 저마다 제각기 해석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의견을 내놓으면서 대장이 무언가 한마디 하기를 조심스레 기다렸다. 대장은 호흡을 고르면서 조용히 중대의 움직임을 보고 있다가 뒤를 돌아 말했다.

“ 뒤진 놈은 없겠지? ”

부관역할인 마셈이 손가락을 까닥이며 그 커다란 눈으로 인원을 세었고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장을 바라보았다. 대장은 중대기의 움직임을 살펴보더니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다친 사람 자수하고... 발맞춰서 돌아가자! ”

대장의 말에 대원들은 제각기 시끌벅적 떠들었다.
휘미는 상황이 모두 끝나고서야 새하얀 얼굴로 숨을 고르고 있는 메지를 발견해내었다.

“ 후아. ”

“ 맙소사. ”

이들은 서로가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메지가 가슴을 움켜쥐더니 신음을 흘렸다. 휘미는 기겁해서 소리쳤다.

“ 왜그래! ”

메지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고개를 흔들더니 품속을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네모난 잉크통을 하나 꺼냈다.

“ 이놈이 목을 압박해서 죽을 뻔했어. ”

휘미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잉크통을 바라보았다. 잉크통 모양이었지만 안에는 푸르스름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뚜껑은 밀봉되어 있었고 통 안에는 길다란 대롱이 통 바닥까지 꽂혀 있어서 한 방울씩 액체가 나오게끔 만들어져 있었다.

“ 그거 나스치가 준거 아냐? ”

휘미가 놀라 말했다. 메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 지금까지 아무 생각 없이 속주머니에 넣어 놨었는데 아까 난리 통에 빠져나와버렸어. ”

메지는 통을 눈에 가져대었다가 때었다가를 반복했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 했다.

“ 근데 이게 뭐지? 진짜로 난논 연구실에 있던 건가? ”

메지는 조심스럽게 잉크통의 밀봉을 풀었다. 휘미가 말했다.

“ 조심해. 폭발물일지도 몰라. ”

메지는 최대한 심혈을 기울여 뚜껑을 열었고 바람을 일으켜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의 얼굴이 당장 찌푸려졌다.

“ 빌어먹을. 휘미! 이 냄새 알아? ”
휘미는 궁금한 나머지 코를 직접 통에 대었다가 헛구역질과 기침을 하다가 침을 뱉어내었다.

“ 썩은 고양이 냄새가 나는데? ”

메지는 자신의 장갑 위에 통을 뉘여 한방울을 떨어뜨렸다. 액체는 가죽으로된 장갑위를 스며들었고 잠시 후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가죽은 마치 살아서 움직이듯 바르르 떨리더니 표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수축되었다가 팽창 되기도 하고 표면이 자유자재로 돌아갔다. 메지는 당황해 어쩔 줄 모르다가 장갑을 낀 손을 반대쪽 어깨에 감추었다.

“ ...내가 아는 바로는 ”

휘미는 멍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저런 효과를 내는 건... 미치광이풀 밖에 없어. ”

메지도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