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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로단. ”

“ 좋지. ”

휘미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내려다가 그가 엉뚱하게 대답하자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없는 풀들로라도 효과를 봤는지 메지는 다시 멀쩡하게 돌아온 채로 옆에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다가 말했다.

“ 나도 좋아. ”

“ 그러니까 뭐가! ”

“ 그게 나도 모르지. ”

휘미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봤고 디로단은 메지와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씨익 웃었다. 휘미는 씹고 있던 풀을 뱉은 뒤 다시 분위기를 추스른 뒤 디로단에게 말했다.

“ 디로단 이제 좀 솔직해 지죠. 어디서 뭐하던 분이에요? ”

디로단은 고개를 반쯤 숙인 채 딴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 난 루나인을 믿는 곳에서 온 용병이라니까. ”

“ 그래요? 저흰 다이지에서 온 학생이에요. ”

휘미가 무뚝뚝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냐는 휘미식 화법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메지가 입을 내밀며 웃은 뒤 다시 말했다.

“ 제발. 그러니까 루나인을 믿는 곳이 어딘데요. ”

“ 루나인이 어디사는데? ”

디로단이 되물었다. 휘미와 메지가 거의 동시에 말했다.

“ 앗사나? ”

“  앗사나고원이라고? 설마. ”

그러자 디로단은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더니 날을 세우고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자신의 손바닥을 그었다. “아악!” 소리를 지른건 두 학생쪽이었다. 디로단의 손에서는 피가 나기 시작했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의 상처는 칼에 베이기가 무섭게 엄청난 속도로 아물고 있었다. 마치 호숫가에 잠시 물결이 일다가 사라진 듯 잠시 생겼던 상처는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휘미가 말했다.

“ 철의 인간인 앗사나 고원인들은 삼십년 이상 고원 밖으로 나온 적이 없다고 했었는데. ”

휘미와 메지는 저마다의 상상에 빠졌다. 앗사나 고원이 있는 날라 산맥은 아케아대륙 북쪽을 모자처럼 뒤덮고 있는 대륙에서 가장 큰 산맥이다. 산맥 너머로는 뭐가 있는지 아무도 모르며 엄청나게 높은 고원들만이 하늘과 맞닿아 있다고 한다. 직접 앗사나 고원으로 올라간 사람은 아무도 없고 다만 멀리서 본 바로는 어마어마한 높이의 고원 위는 매우 평평하며 올라갈 수 없게 사방이 수천미터의 절벽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비가오게 되면 그 높은 고원에서 마치 새는 바가지처럼 수천개의 폭포가 만들어져 물을 지상으로 쏟아내는 장관을 펼친다고 한다.
고원에는 지상과는 전혀 다른 동식물들이 살며 고원 아주 깊숙한 곳에는 앗사나 인들이 자기들만의 문화를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앗사나인들이 직접 밖으로 나오지 않는 한 이런곳을 일반사람들은 찾아갈 엄두가 날 리가 없다.
다만 오래전 하늘 전쟁때 윔이 앗사나인을 용병으로 사기위해 세상에서 가장 긴 밧줄을 가진 수백명의 사찰단을 보낸 적이 있었고 그로인해 극소수의 앗사나 인들이 윔으로 내려왔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것이 앗사나 인들이 역사에 등장한 유일한 기록이다.

역사적인 인물을 두 눈으로 보고있다는 것만으로도 휘미와 메지는 신기함을 감출 수 없었다. 디로단은 그들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 날 도와준 대가야. 절대 아무한테도 안 알려주려고 했던 건데. 다 놀랐으면 이제 나도 얘기해줘. 메지는 대체 어떻게 된건지. 그냥 숨겨진 실력이었다는 대답은 안 듣게 되길 바래. ”

메지는 품속에서 잉크통 하나를 꺼내서 흔들었다.

“ 고급 연금술을 이용해서 만든 비약이에요. 아 물론 이건 저희가 만든게 아니에요. 어떻게 운이 좋아서 손에 넣게 되었는데 성능을 처음 시험해보게 된거죠. ”

디로단은 유심히 액체를 바라보았다. 그가 말했다.

“ 정말 굉장하군. 대륙에서 한 번도 못 보던 거야. 이런 신기한 것들이 더 있나? ”

두 학생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휘미가 말했다.

“ 청단월 날만 피는 신비한 풀들을 이용하면 다른 비약들도 만들 수 있어요. 폭발을 일으켜서 사핀녀석들을 한번에 수백명씩 죽일수 있는 것도 만들 수 있을거에요. ”

디로단은 그말을 듣고는 놀라기보다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 너희같이 연금술을 잘 다루는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까? ”

“ 글쌔요. 다이지를 거처간 자들은 모두 어느 정도 알고 있겠죠. 하지만 그런 엄청난 약을 만들 만한 사람은 거의 없어요. 어떤 교수 한명이랑, 피스너 정도? ”

디로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제기랄 ”

2소대 부상병들이 의무막사에서 소대로 돌아왔을 때는 반 이상이 숙영지 보수를 하러 나가서인지 매우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 마셈! 마셈이 없네. 어라? 으롬도 없고. ”

한쪽 팔을 다친듯 두꺼운 가죽끈을 왼팔에 묶고 있는 기삭이 소대원들의 얼굴을 차례차례 보더니 말했다. 대장이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 마셈은 죽었다. 으롬은 다리가 아직 덜 나아서 며칠 쉬다가 복귀할꺼고. ”

기삭은 표정이 굳어져 고개를 숙이고는 몇 초간 묵념을 하고는 말했다.

“ 불쌍하게 되었군. ”

2중대의 2소대는 선두중대에 속해있던 탓에 피해를 피해갈 수 없었다. 16명의 소대원들이 죽거나 다쳐서 전장을 떠났고 대신 6소대 대원들이 그 자리를 매웠다. 그나마 2소대는 1소대에 비해 피해가 훨씬 적은 편이었다. 1소대는 절반이상의 대원이 죽거나 전투 불능 상태가 되어버렸다.

“ 이런 기분이군. ”

밤이되자 숙영지에는 새롭게 화로가 마련되었고 대원들은 화로를 빙 둘러 앉아 휴식을 취했다. 휘미는 숙영지 전체의 분위기가 가라앉자 또 덩달아 기분이 우울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몇몇 대원들은 그걸 즐기는 듯 보였다. 메지는 분위기에는 신경이 잘 쓰이지 않는지 빵을 입속에 한꺼번에 구겨 넣고는 휘미의 것까지 뺏어먹었다.

“ 휘미. 나 그 약 마신 뒤로 속이 좀 쓰리는것 같아. ”

“ 그 외에는? ”

“ 글쌔. 중독되거나 금단현상이 있지는 않은것 같은데... 다만 아나들나 무소냐쇼즈 같은 놈들이 내 앞에서 나대고 있다면 다시 생각날 거 같아. ”

“ 그건 정상이고. ”

팔을 다친 뒤로 다소 얌전해진 기삭이 어슬렁거리며 일행의 근처에 오더니 칼끝에 빵을 끼워 불 위에다 구우면서 말했다.

“ 내일이면 드디어 이 숙영지를 떠난다. ”

“ 드디어 그 엄청난 전투를 하러 가는거야? ”

메지의 말에 기삭은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휘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 메지가 잘싸운다는 소문이 있더군? ”

“ 도망만 다녔는데. 무슨소리. ”

메지는 미리 휘미와 짜놓은 대로 정색을 하며 말했다. 기삭은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다.

“ 아냐. 대장이 그러던데. ”

기삭은 대장이 있는 화로 반대편 쪽을 바라보며 윙크를 한번 하고는 다시 말했다.

“ 메지랑 디로단이 수십명을 해치워버린 덕에 자기도 퇴로를 만들수 있었다나... ”

메지가 얼굴색이 변하며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잠자코 옆에 있던 휘미가 웃으며 얘기했다.

“ 비슷하게 생긴 다른 중대 사람이겠지. 워낙 정신없었잖아? ”

기삭은 코를 찡긋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숙영지 복구에 동원되었던 싯딜이 돌아오자마자 기삭의 엉덩이를 발로 차면서 말했다.

“ 이놈아!! 용케 살아왔구나. 네가 그렇게 뭣도 모르고 날뛸 때마다 내가 살아남을 ‘확률’ 까지 같이 떨어진다는 거 아느냐? ”

메지만이 싯딜의 말을 알아차리고는 웃었다. 기삭은 싯딜을 보더니 얼굴이 금세 환해져서 그에게 장난을 걸었다. 휘미는 시선을 돌려 숙영지를 살펴보다가 빙 둘러진 화로 한편에 약간 떨어진 구석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디로단을 보았다. 휘미가 다가가자 그가 말했다.

“ 고마워. ”

“ 당신이 아니었으면 우린 그전에 죽었겠죠. ”

디로단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휘미도 덩달아 하늘을 보았다. 누가 신경을 쓰던 쓰지 않던, 하늘엔 항상 달과 별이 있었다. 바라보기만 하면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그들을 휘미는 매우 편리한 친구라고 생각했다.
주변은 고요했고 모닥불의 복사열은 은은하게 이들을 어루만져 주었다.
두사람은 나란히 팔을 뒤로 지탱에 땅을 짚고 잠시 동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디로단이 말했다.

“ 나도 괜찮은걸 하나 알려주지. ”

휘미가 고개를 내려 그를 보자 디로단이 말했다.

“ 하늘의 생김새로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 수 있지. 이른바 하늘의 관상인 건상을 보는거다. ”

“ 어떻게? ”

“ 앗사나고원은 하늘과 매우 가까워서 더 자세히 볼 수 있지만 여기도 그리 나쁘지 않군. 달의 표정을 먼저 보고, 아울러 별의 모습이나 구름의 모양과 흘러가는 속도를 보고 하늘의 표정을 읽는거야. 날씨예측도 가능하고, 운명도 점쳐볼수 있지. 근데 지금같은 경우는 하늘이 입을 닫았어. ”

“ 그게 보여요? ”

휘미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디로단은 진지했다.

“ 주기적으로 달표면이 흔들리고 있고 별또한 밝기가 들쭉날쭉하잖아. 그리고 별과 구름 모두 규칙적이지 못한 모양으로 흩어져 있다. ”

“ 썩 안좋은 상태군요. ”

“ 썩 안좋지. ”

휘미는 디로단이 그렇게 쉽게 말해버리자 다시 기분이 가라앉았다. 휘미는 반으로 쪼개진 모양의 달을 찡그리며 노려보다가 눈을 감아버렸고 다시 실눈을 떠 디로단의 표정을 보았다. 그는 경건한 표정으로 하늘을 뚫어질듯 바라보고 있었다. 대륙의 사람이라면 모두 하늘에 대해 관심이 많지만 디로단은 그 이상인듯 했다. 하긴. 외부와 단절된 채 오로지 고원에만 사는 사람이다. 겉보기가 윔사람들과 별로 다른점이 없는것이 오히려 신기했다. 휘미는 다시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멀리 불빛에 비친 동료들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새삼스럽게 이질감이 다가와 그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정말이지 지금 눈을 감았다가 뜨면 다시 다이지 강의실에 앉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처음보다는 훨씬 나았다. 이곳은 경험만 있으면 되는 곳이다. 있을수록 자기도 모르게 계속 조금씩 적응하게 되는 곳이었다. 예전에는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로 빠르고 아찔한 순간들 투성이지만 잠깐 지나고 난 뒤에 생각해보면 모두 그럭저럭 멋지게 느껴졌다. 그는 여기도 충분히 살만한 곳이라고 단정 지었다. 언젠가는 적응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이 자리에 계속 있는다면 그도 나중 언젠가는 으롬이나 대장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까지와 같다면 말이다.

와월의 넷째날 새벽은 분주했다. 동이 틀 기미도 안보였지만 군단은 벌써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사불란하게 숙영지를 정리하고는 새벽 서광이 지평선을 넘어서자마자 행군을 시작했다.

“ 여긴 갱가를 안하는군. ”

메지가 졸린 눈으로 투덜댔다. 휘미도 기수가 기계적으로 넣는 구령소리가 따분했는지 줄곧 어둑어둑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걸었다.
행군하는 군단의 가장 앞에는 짐마차를 끄는 보급부대가 있었고 그 다음이 비교적 몸집이 가벼운 지원중대가 위치했다. 가운데에는 중무장한 잿빛칼날 중보병들이 자리잡았으며 그 양옆으로 중대를 호위하듯 일천기가 채 안 되는 기마대가 넓게 위치해 있었다. 후위에는 군단장과 그의 호위군과 본부중대가 위치해 있었다.

협곡을 무사히 통과한 윔의 군단은 일부러 길을 돌아 구릉을 넘으면서 행군의 존재를 일찍 적에게 알렸다. 메지는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디로단이 몇 번씩 손가락으로 위치를 확인해 주자 뿌연 안개속에 떠 있는 듯한 스니게치 성의 윤곽을 인식할 수 있었다.
드넓은 스니게치 평원은 서쪽으로는 날라 산맥에 막혀있었으며 북쪽으로는 눈보라 평원과 맞닿아 있었다. 사핀 본국과는 남쪽으로 길이 연결되어 있는데 바로 그 길목이 윔 군단의 도착지였다.

“ 저놈들이 과연 나오긴 나올까요? ”

“ 길을 막아놨으니 보급로가 막혔잖아. ”

대장은 대상을 꿰뚫는 듯한 눈빛으로 멀리 스니게치성을 바라보았다. 성 주변은 매우 적막해보였고 평원에는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휘미는 왠지 허무한 느낌이 들어 창을 거꾸로 들어 땅에 박고 몸을 축 늘어뜨렸다. 메지도 그의 옆에 주저앉아 말했다.

“ 힘들어 죽겠다. 그래도 처음보단 걷는데 적응된것 같네. ”

“ 걷는것 뿐만이 아니던데. ”

언제 옆으로 왔는지 대장도 메지의 곁에 바짝 오더니 갑옷끈을 풀고 뒤로 주저앉으며 말했다.
메지는 침을 꿀꺽 삼키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했다.

“ 맨날 머릿속으로 연습하고 있으니까 싸우는것도 금방 나아지더군요. ”

“ 그래? ”

대장은 더 이상 토씨를 달진 않았다.

이 시각, 새 군단장이 된 로소줌은 온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잔질을 위머로 돌려보낸 뒤 그의 눈은 어느 때보다도 승리에 대한 갈망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책상에 수십개의 진형도를 어질러 두고는 고민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하나를 뽑아 지원군 장교들에게 내밀었다.

“ 바로 이거다!”

장교들은 동시에 그의 진형도를 내려다보았다. 로소줌은 몸을 떨기까지 하면서 말을 했다.

“ 무소냐쇼즈를 졸업할때까지 혼자 개발하여 간직하고 있던 진형이지. 현존하는 거의 모든 전술서와 병법서의 진형을 참고하였다. 빈틈도 없고 허점도 없는 진형이다. 한마디로 절대 질 수 없다는 얘기지. ”

장교들은 침을 삼키며 그의 진형도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전체적인 틀은 정석적인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양 옆 날개에는 기병을 배치하고 선두에는 지원군단의 경보병을, 중앙에는 잿빛칼날 군단의 핵심병력인 중보병이 위치했다. 특이한 건 전체적으로 보면 진형의 모습이 U자형으로 휘어져 있어서 전투시 선두 중앙의 병사들이 가장 먼저 적들과 맞부딪치게 되어 있었다.

“ 저들은 우리보다 기병수가 더 적을게 분명하다. 저 추운 산맥을 넘어오면서 말을 데려오기는 굉장히 힘든일이니까. ”

로소줌은 팔짱을 낀 채 장교들에게 덧붙여 말했다.
장교들은 한참동안 진형을 살펴보고 다시 몇차례 질문한 뒤에야 사령관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로소줌의 진형은 이것이었다.
선두의 경보병 중대는 중앙을 기점으로 유선형으로 휘어진 두개 진형으로 갈라져 있다. 따라서 실제 전투시에는 중앙이 비어서 2선에 있던 중보병들이 먼저 적과 부딪칠 것이 분명하다. 경보병 중대는 양옆에서 적당히 싸우다가 중보병들이 모두 선두로 올라가면 비교적 민첩한 이동력을 이용하여 양옆의 기병들을 뒤쫓아 가장자리를 돈다. 중보병들은 쉽게 밀리지 않으므로 버티는 동안 경보병과 기병들은 적진 전체를 포위를 하고 그때까지 버틴 중보병들을 도와 함께 적을 섬멸시킨다는 작전이었다. 장교들이 탄성과 함께 말했다.

“ 예전에 있었던 유명한 진형들과 전술들이 모두 응집되어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

“ 어떠한 방법으로도 패배할 수 없는 진형이 분명합니다. ”

“ 약점이 없는듯 보입니다. ”

로소줌은 그들의 반응은 당연하다는듯 다른것들에 대해서도 말하기 시작했다.

“ 적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야 해. 적장의 성격, 그날의 기분, 아침에 뭘 먹었는지까지도! 그리고 지형과 날씨, 기후에 대해서도 완벽해야만 한다. 물론 지금까지 나름대로 파악을 해 왔지만 단월이 찾아온다든지, 특히 안개가 낀다든지 하는 갑작스러운 변수가 생길수도 있다는 말이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

로소줌은 감탄스럽게 그를 쳐다보고 있는 장교들을 한번 둘러보고는 책상을 주먹으로 강하게 누르며 말했다.

“ 이런게 다 갖춰져 있더라도 우리가 싸우고 싶을 때 싸워야 이기는거야. ”

장교들은 모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금까지의 로소줌의 말에서 틀린점을 찾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그는 최정예 장군 양성소인 무소냐쇼즈를 나온 자였다. 그리고 다른 동기들에 비해 어린 나이에 사령관이 될 수 있었다는 것도 그가 적어도 무소냐쇼즈의 교과 과정 안에서는 매우 뛰어났다는 것을 증명했다. 로소줌은 흥분한 얼굴로 한동안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진형도를 장교들에게서 받아들고는 회의실로 향했다.

비교적 간단하게 새 숙영지를 세운 뒤 대기하던 윔의 군인들중 가장 앞쪽에 있던 자들이 척후병과 함께 허겁지겁 달려왔다.

“ 사핀군이 움직인다! ”

눈이 그다지 좋지 못한 휘미와 메지는 디로단의 설명을 듣고 대충 정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 성에서 꾸물꾸물 나오고 있군. 엄청난 수인데. 동쪽으로 꺾는걸로 봐서는 아마 진형 한쪽을 산기슭에 붙일 모양이다. ”

디로단은 바로 10m 앞의 사물을 보고 얘기하듯 간단하게 설명했다. 메지가 콧등을 긁으며 물었다.

“ 왜 평야 한가운데로 안나오는 거죠? ”

디로단은 그걸 왜 나에게 묻냐는 식으로 메지를 쳐다보다가 그가 둥그렇게 뜬 눈을 그대로 그에게 고정시키고 있자 할 수 없이 말해주었다.

“ 일게 용병따위가 이런걸 말한다는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저들은 기병전을 최대한 피하고 싶다 이거지. 산기슭에 붙어 있으면 양옆에 위치한 기병들의 이동에 지장이 많고 또 울퉁불퉁한 자갈들도 많을 테니까. 말들이 달리기가 힘들어. ”

“ 저들은 기병이 없는건가요? ”

“ 있긴 있겠지. 하지만 우리보다도 수가 적다는 얘기지. ”

휘미는 이해가 안간다는듯 말했다.

“ 사핀에도 추위를 잘견디는 말 품종이 있다고 들었어요. 담가라 라고 하던가. ”

디로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 맞아. 담가라. 저들이 담가라를 많이 가지고 있다면 꽤 힘들었을지도. ”

“ 하지만 왜? ”

디로단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 고원에서만 살던 나에게 자꾸 어려운걸 묻는군. 쟤넨 저길 넘어왔대잖아. ”

디로단은 손가락을 뻗어 멀리 까마득한 안티크로니움 산맥을 가리켰다. 죽어서도 절대로 건너고 싶지 않게 생긴 끝없는 산자락이 눈보라 속에 파묻혀 있었다.

동이 완전히 트자 사핀군은 산기슭 쪽에 진형을 완성하고는 윔군을 우두커니 노려보고 있었다. 두 학생이 속한 소대는 거의 선두 쪽에 배치가 되어서 사핀군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진형을 갖춰 회전을 벌이는 경험은 처음이기에 두 학생은 긴장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진형은 전혀 움직임이 없었고 주변은 바람에 깃발이 날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간 태양은 추위를 뚫고 미약하게나마 빛을 내려주고 있었다.

“ 저 앞에 쭉 늘어선 놈들은 우릴 기습했던 가로소인들인가요? ”

휘미는 날카로운 눈으로 적진을 바라보며 소곤거렸다. 디로단이 대답했다.

“ 우리랑 제일 먼저 붙을 놈들이지. 근데 진형 전체가 어떻게 되어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마 우리 용병부대의 경우는 두갈래로 나뉘어져 있는걸로 봐서는 대충 싸우다가 어디 덜 중요한 곳으로 이동할거 같아. ”

메지는 감탄하여 디로단을 바라보았다.

“ 디로단은 대장보다도 더 잘 아는것 같네요. 그런건 도대체 어디서 배운거에요? ”

디로단은 입을 다물고 있다가 잠시뒤 천천히 말했다.

“ 고원에서 배웠지. ”

“ 거긴 대륙에서 나오는 책은 없지 않나요? ”

“ 꼭 그렇지도 않아... ”

디로단은 항상 그렇듯 얘기하기 곤란한 것이 있으면 말끝을 길게 늘여 여운을 남겼다. 휘미도 그걸 알아차리고는 계속 궁금해 하는 메지를 눈짓으로 말렸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흐른 뒤 메지가 다시 말을 꺼냈다.

“ 근데 그 늙은 군단장은 안 보이는군요. 그때이후로. ”

메지의 말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반응하자 그는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 쇠팔찌 녀석 눈치가 없군. ”

휘미는 그 말과 함께 아차 하는 느낌이 들어 디로단을 바라보았다. 디로단은 적진에 시선을 둔 채 손에 입만 가져다대었다. 휘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고민하고 있는 메지의 귀를 잡고는 말했다.

“ 잔질은 이미 여기 없다는데. ”

“ 뭐? 그럼 누가? ”

휘미는 한숨을 쉬었다. 메지의 표정은 급속도로 구겨졌다.

“ 설마, 그놈이? ”

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그놈이 여기로 우리를 대리고 왔고, 이것도 그놈이 만든 작전이란 말이지? ”

휘미는 메지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으나 그는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더니 주저앉으며 말했다.

“ 망했다. ”

휘미도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지 인상을 구기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메지는 다 터진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휘미에게 조용히 말했다.

“ 어쩐지. 어제 군대를 돌려서 협곡으로 돌진한것도 그녀석이 한 짓일 거야. 지원군만 나갔잖아. ”

“ 됐어. 누가 했건 간에 우린 살아만 있으면 되는거 아냐. 전략이 어떻건. 진형이 어떻건. 게다가 우린 디로단도 있잖아.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된다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인데 설마 대장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걸 모르고 있을까. 군단장이 없어진건 나도 방금 알았는데 그냥 그런건 쉬쉬하는 거야. 자꾸 언급을 하면 기운 없어 질까봐. ”

휘미가 길게 이야기하고 난 뒤에야 메지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미동도 하지않는 적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