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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1장 글 쓰는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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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장님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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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증명사진 / 제4장 국사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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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문학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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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짓궂은 장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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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왼손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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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젊은 문학도의 사회 & 제9장 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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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우리들의 비겁한 영웅 & 제11장 크로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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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칼을 찬 교사 & 제13장 비밀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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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혀에는 목 & 제15장 금수 랩소디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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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문학 선생님









마지막 교시인 문학 시간, 칠판에는 소설의 갈래, 시점, 특징 등이 빽빽하게 적혀있었고 그 앞에는 도문호 선생님이 참고서를 든 채 소설을 죽 읽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인간 오디오북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각자 저마다 잠을 자거나 몰래 수학 문제집을 꺼내서 보거나 낙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도문호 선생님은 학생들이 전혀 집중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 듯 했지만 애써 무시하고 혼자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너희들은 자라, 나도 수업시간만 채운다.’는 태도가 그의 행동과 말투 곳곳에서 드러났다.





열정 없는 이 수업만큼은 준억과 태운도 소곤대면서 시간을 보냈다. 도문호 선생님의 수업은 참고서 하나를 개인적 잡담과 버무려 중구난방으로 펼쳐놓은 것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준억과 태운은 며칠 전 읽었던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 소설이 세계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까. 한 남자가 벌레로 변한 이야기를 그린 말도 안 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인데 말이야. 완전 판타지잖아?” 태운이 물었다.

“우리는 벌레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벌레가 의미하는 것에 주목해야 해. 벌레가 되기 전 주인공은 가족의 생계를 유지해주는 꼭 필요한 존재였지. 그렇지만 벌레가 되고 난 뒤부터 주인공은 말 그대로 벌레취급을 받아. 달라진 건 그의 외적인 모습으로 인한 돈을 벌지 못하는 능력의 부재일뿐인데 말이야. 여기서 주인공은 깨닫는 거야. 자신과 벌레의 차이점은 경제적 필요성 그것뿐이라는 걸.”





“하지만 굳이 벌레라는 우화적 개념을 가져오지 않고 현실적으로 가부장의 고독을 묘사해도 좋았을 텐데. 그게 더 진실성도 있고.”

“현실성이 진실성은 아니잖아.”

“무슨 말이야?”

“가령 네가 꿈을 꾼다고 생각해봐. 알다시피 꿈은 비현실적 공간이지. 하지만 꿈속에서 너는 두려움이나 기쁨과 같은 감정을 느껴. 그 감정들은 거짓된 것일까? 적어도 그때만큼은 진실한 감정이잖아. 어쩌면 꿈과 같은 환상은 현실보다 더 실감나게 전달할 수 있을지 몰라. ‘변신’도 마찬가지야. 비록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겠지만 그 느낌만큼은 진짜이기에 가부장의 고독을 효과적이고 진실하게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거야.” 준억의 말에 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쓴 피터 팬 소설도 비슷한 맥락이지. 환상을 통해 소년의 미성숙성을 부각시켰잖아.” 준억이 덧붙여 말했다.

“그렇구나. 그럼 이 소설은 환상을 이용해 가부장이 느끼는 고독을 표현한 거라고 보면 되겠네?”





“더 확장해서 인간의 수단화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태운은 몇 주 전 준억과 나눴던 대화를 상기했다. 그때 태운은 자아실현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했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타협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어려운 문제였다. 이 소설의 주인공 그레고르도 이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외판원이 되었고, 어느새 사회의 도구뿐만 아니라 가정의 도구로 전락해버렸다는 사실이 너무도 괴로웠을 것이다.

태운은 준억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칠판 쪽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앞에 커다란 벌레가 보였다. 교편과 분필을 양 손에 잡고 안경을 다시 쓰는 대머리 벌레가 앞에 있었다. 학생을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닌, 현실에 굴복해 돈을 벌려고 이곳에 선 벌레가. 권태 속에 허우적거리며 열정 없이 살아가는 그레고르가. 태운은 한편으로는 역겨움을, 한편으로는 연민을 느꼈다. 그는 선생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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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문학 선생님 [2화]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서 중심적으로 살펴봐야 할 것은 주인공이 쓰는 고현학이라는 창작 방법이다. 현대적인 일상생활의 풍속을 면밀히 조사 탐구하는 행위를 말한다. 줄긋고 별표 쳐라. 작가 박태원은 이를 통해 소설을 쓰고자 하는 주인공의 열망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도문호 선생님은 참고서 내용 그대로 읊었다. 떠드는 몇을 제외하고는 반 아이들은 조느라 그의 말을 듣지도 못한 것 같았다. 이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문호 선생님은 또 딴 길로 빠지고 말았다.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나도 선생이 되기 전에 소설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허황된 꿈이었지.” 태운은 경악하고 말았다. 지극히 현실적인 저 선생님에게도 꿈이 있었다. 그것도 태운이 가진 꿈과 같은 꿈을 가지고 있었다. 태운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꿈을 포기하고 현실을 선택했다는 점이었다.

태운은 허풍 떠는 그를 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역겨움을 느꼈다. 마치 아버지의 단점을 경멸해 닮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마음속 깊이에는 자신이 아버지와 닮았다는 걸 아는 아들의 심정처럼,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결코 미래에 이도 저도 아닌 저 사람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태운은 자신이 썼던 단편을 들고 선생님을 쫓아갔다. 타산지석이라고 도문호 선생님이 범한 인생의 오류를 태운도 겪을 순 없었다. 선생님은 교무실로 잽싸게 들어가려고 했고 태운은 그를 붙잡았다.





“무슨 일이지? 저녁시간인데 조금 있다가 다시 오렴.” 선생님의 표정에는 귀찮아하는 내색이 가득했다.

“선생님, 잠깐이면 됩니다.” 태운은 단편을 그에게 건넸다.

“제가 쓴 단편소설이에요. 제가 소설가로서 가능성이 있는지 알고 싶어요. 한 번 읽고 평가 부탁드립니다.” 선생님은 손을 내저었다.

“난 소설에서 관심을 끊은 지 오래다. 미안하지만 거절해야겠구나.” 선생님은 단편을 다시 태운에게 줬다.

“가지고 계시다가 나중에 시간 나시면….”

“내 말 못 들었니? 난 이제 소설을 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혀 읽지도 않는단다.”





“하지만 선생님은 문학 선생님이잖아요.” 태운은 선생님의 얼굴을 살펴봤다. 그의 표정에서는 열정을 찾을 수 없었다.

“수업시간에만 소설 읽는 걸로 족해. 누가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하겠니? 저녁 많이 먹어라.” 선생님은 교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이틀 동안 태운은 괴로웠다. 도문호 선생님과 자신은 다르다고, 그는 꿈을 포기했지만 자신은 계속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자신을 위로했다. 그럼에도 그는 미래의 실패한 자신을 본 듯해서 그 생각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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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문학 선생님 [3화]









다음 문학수업이 다가왔고 언제나 그렇듯이 지루하고 쓸모없는 강의가 시작되었다. 태운은 다른 애들과는 다르게 선생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했다. 준억은 그런 태운을 보고 놀라워했지만 태운은 신경 쓰지 않았다. 선생님은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후반부를 읽고 있었다.

“‘구보는 벗이, 그럼 또 내일 만납시다. 그렇게 말하였어도, 거의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이제 나는 생활을 가지리라. 생활을 가지리라. 내게는 한 개의 생활을, 어머니에게는 편안한 잠을…. 평안히 가 주무시오. 벗이 또 한 번 말했다. 구보는 비로소 그를 돌아보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하였다. 내일 밤에 또 만납시다. 그러나 구보는 잠깐 주저하고, 내일, 내일부터, 나 집에 있겠소, 창작하겠소….’” 도문호 선생님은 글자 그대로 읊기만 했다. 소설 작품을 배울 때면 그저 통째로 다 읽는 데에만 수업의 90%를 할애했다. 태운은 손을 들었다.





“선생님, 질문이 있습니다.” 도문호 선생님이 안경을 고쳐 쓰더니 태운을 안경 너머 살펴봤다. 전혀 반기지 않는 태도였다.

“다 읽고 글의 성격을 적을 때 질문을 받겠다.”

“구보 씨는 현실을 선택했잖아요. 그러면서도 왜 소설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거죠.” 태운은 끝까지 매달렸다.

“어느 부분 말이냐?” 도문호 선생님이 성가신 내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태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낭송하기 시작했다.

“이 부분 말이에요. ‘이제 나는 생활을 가지리라. 생활을 가지리라. 내게는 한 개의 생활을, 어머니에게는 편안한 잠을….’ 그런데 뒤에서는 ‘참말로 좋은 소설을 쓰리라.’ 하며 다짐하고 있잖아요. 자식이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결혼하길 바라는 어머니의 욕망을 물리치지 않으면서도 소설 창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잖아요.”





“잠시만 기다려라.” 도문호 선생님은 손에 든 참고서를 뒤지기 시작했다. 무심하고 무책임한 태도였다.

“전 참고서가 아닌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어요!” 태운이 소리쳤다. 선생님은 그런 태운의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란 듯 쳐다보더니 고민했다. 깨어있었던 몇몇 애들도 놀란 것 같았다. 선생님은 잠시 후 천천히 입을 뗐다.

“현실이라는 매서운 바람이 열정이라는 작은 촛불을 삼켰기 때문이야. 소설에 대한 열정과 영감은 강했지만 현실을 견딜 만큼은 강하지 못했던 거지. 그렇지만 불씨까지 없앨 수는 없었어.”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자조적으로 들렸다.

“그만 앉아라.” 태운은 힘없이 자리에 앉았다. 태운은 선생님의 말에서 그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삶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삶을 인정하는 건 태운의 암울한 미래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현실이 매서웠던 것이 아니라 열정이 나약했다고 생각했다. 태운은 그의 존재를 부정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따라서 반항하기로 결심했다. 도문호 선생님의 현재와 태운의 밝은 미래는 결코 공존할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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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문학 선생님 [4화]









수업은 다시 시작되었고, 태운은 가방에서 MP3P와 연습장을 꺼냈다. 이어폰을 귀에 끼고 연습장에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태운을 봤지만 쉽게 무시해버렸다. 태운은 더욱 열정적으로 글을 휘날려 썼다. 음량을 더욱 높였다. 귀가 터질 듯 아팠다. 손이 미칠 듯 저렸다. 연습장에는 의미 없는 감정의 나열이 적혀져갔고 노랫소리는 귀를 넘어 교실에 울려 퍼졌다.

1반 학생들은 저마다 하던 것을 멈추고 태운을 쳐다봤다. 미쳤다고 비웃는 애도 있었고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그를 걱정하는 학우도 있었지만 태운은 멈추지 않았다. 천하의 무관심한 도문호 선생님도 이것만은 무시할 수 없었다. 이건 누가 봐도 교사의 권위에 도전하는 반항이었다.

“박태운! 그만 두지 못해!” 도문호 선생님이 소리쳤다. 태운에게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노랫소리에 덮였는지 감정적으로 무시해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계속해서 글을 써내려갔다. 그때 누군가가 쉴 새 없이 움직이던 그의 팔을 잡았고 복도로 끌어 나갔다. 그리고 복도 끝으로 태운을 내동댕이쳤다. 연습장은 이리저리 구겨졌고 이어폰은 부서졌다.





“너, 불만이 뭔데?” 도문호 선생님이 태운을 향해 소리쳤다. 태운은 바닥에서 힘겹게 일어났다.

“선생님은 불만이 뭔데요?”

“뭐라고?”

“선생님은 불만이 뭐기에 그토록 우리에게 무심하냐고요. 창문만 보는 게 선생인가요?”

“이 자식이….” 도문호 선생님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말을 잇지 못했다.

“선생님은 소설 대신 현실을 선택했다면서요. 그런데 어째서 아직도 미련이 남아있는 거죠? 왜 현실에 충실하지 못하고 지나간 것, 잃은 것에 후회만 하죠? 소설 무시하기로 했으면 무시하고 살라고요.” 태운은 떠나간 가능성이라는 미련 따위는 원하지 않았다.

“야 인마….” 도문호 선생님은 회초리로 그를 때리려고 했고 태운은 그의 손을 가로막았다.

“저는요, 절대 선생님처럼 되지 않을 거예요. 포기면 깨끗하게 포기할 거고, 그렇지 않으면 악착같이 붙을 거예요. 선생님처럼 노력도 안하고 포기해놓고서는 미련 갖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거예요.”





“내가 노력을 안했다고?” 도문호 선생님이 소리를 질렀다. 그토록 그가 감정에 휘둘린 건 보지 못했다. 평소의 그는 언제나 침착했고 권태로웠다. 하지만 태운의 말이 그의 아킬레스건을 자극한 것 같았다. 선생님은 교무실에 가더니 원고지뭉치를 가져와 태운에게 던졌다. 원고지들은 낱장이 되어 바닥에 흩어졌다.

“내 피와 살이었던 글이다. 이걸 보고도 내가 노력하지 않았다고, 발악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어? 나도 너희들처럼 꿈이 많았어. 그러나 현실은 달라. 꿈이란 언젠간 깨어나는 것이야.” 도문호 선생님은 교무실로 돌아갔다. 태운은 흩어진 원고지들을 주섬주섬 주웠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쳤고 다른 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복도에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태운은 인파를 뚫고 교실로 들어갔다. 1반 애들이 태운에게 왜 그랬냐고 질문공세를 펼쳤지만 태운은 무시하고 자리에 앉았다. 준억은 바로 곁에서 그를 탐탁지 않게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중찬이 태운에게 다가왔다.

“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선생님한테 대들 수 있어? 네가 그런 놈일 줄은 몰랐다.” 중찬이 구박했다.





“실망시켜서 미안하다. 네 드높은 도덕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해서.” 태운이 짜증을 냈다. 중찬은 그의 태도를 보고는 혀를 차며 자리를 떴다.

“태운아, 네가 그런 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렇지? 너는 이런 녀석이 아니잖아.” 조용히 뒤따라왔던 상수가 물었다. 상수는 그의 해명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태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뒤에서 동훈이 상수를 밀치고는 태운에게 말을 걸었다.

“야 인마 너 그렇게 안 봤는데.”

“….”

“정말 멋졌어. 저런 선생은 우리 시간만 빼먹을 뿐이야. 고3에게 필요없는 수업을 강요하는 건 시간폭력이나 다름없으니. 너도 같은 생각이었나 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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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문학 선생님 [5장 완결]









수업 종이 쳤고 1반 학생들은 음악실에 가져갈 자습거리를 꺼내러 사물함에 갔다. 3학년은 음악시간에도 자습하기 때문이었다. 애들이 주위에서 없어지자 태운이 준억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아니야. 아무것도.” 준억이 받아넘겼다.

“내가 맞춰볼까? 너는 내가 ‘변신’에 나오는 그레고르의 가족들과 비슷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지? 온갖 비유를 들어가며 내가 그를 경멸하는 게 잘못된 거라고 말하고 싶지?” 태운이 따졌다.

“전혀. 너는 그런 사람들과는 달라. 그들의 경멸은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 즉 잘 알지 못해서 생긴 경멸이지만 네 경우엔 동질감에서 오는 자기혐오라 할까.” 준억이 차근차근 설명했다. 태운은 그런 그에게 괜스레 짜증이 났다. 꿰뚫어보는 그가 불쾌했다.





“그래 잘 났다. 이젠 네가 내 생각을 분석하는 것도 남의 감정을 넘겨짚는 것도 지긋지긋해! 난 결코 도문호 선생님에 대해 동질감 따윈 느끼지 않아. 알겠어? 그는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야.” 태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음악실로 떠났다. 음악실에 도착한 그는 어디에 앉을지 고민했다. 평소였으면 준억과 함께 왼쪽 구석에 앉았겠지만 그는 준억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모든 일에 대해 평가하는 준억이 싫었다. 태운이 지금 원하는 것은 그가 잘했든 못했든 지지해주는 친구였다.

“내 옆에 앉아.” 맨 뒤에 앉은 동훈이 태운을 보더니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태운은 잠깐 고민했지만 옆에 가서 앉았다.

“넌 날 싫어하잖아.” 태운은 며칠 전 그가 했던 험담이 생각나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건 과거의 일이고, 너의 새로운 모습을 보기 전이지.” 동훈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태운은 그의 털털한 행동이 마음에 들었다. 부담 없이 어울릴 수 있는 상대라 생각했다. 잠시 후 준억이 음악 교과서를 들고 음악실에 들어왔다. 그는 태운을 쳐다보더니 원래 태운과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는 준억과 같이 안 앉네?” 태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따라 네가 엄청 마음에 드는걸. 준억 걔가 좀 답답한 면이 있긴 하지. 걔가 네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해. 나는 아니야. 정말 잘했다고 생각해. 그 선생 꼴 보기 싫었는데 속 시원하게 잘 말해줬어. 네가 대들지 않았다면 내가 대들었을 거야.” 태운은 그가 자신을 치켜세우는 것을 들으며 흡족해했다.

노란 머리의 여선생님이 음악실로 들어왔고 학생들은 자습을 시작했다. 그녀의 가마에는 어느덧 까만 머리카락이 올라와 있었다. 음악시간이 끝나고 저녁시간이 되어도 태운은 준억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가 보기 싫었다. 태운은 이를 동훈에게 털어놓았다.





“준억 옆에 있기 싫으면 이번 자습시간 때 내 옆자리로 와. 마침 나도 내 짝에게 싫증이 나거든. 내가 걔를 잘 구슬려볼게.” 동훈이 그의 고민을 듣고 말했다. 동훈의 제안은 성공했고 태운은 공부할 것들을 가지고 동훈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준억은 태운의 행동을 보면서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준억이 섭섭해 할 것이라 기대했던 태운은 여느 때와 같이 침착한 그를 보고 화가 났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새로운 곳에서의 야간자습시간이 시작되었고 태운은 공부 대신 원고지뭉치를 꺼냈다. 도문호 선생님의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순서는 엉망진창이었지만 잘려진 문장을 이으며 맞춰갔다. 글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수필에 가까웠다. 잘 쓴 글은 아니었다.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패배의식에 찌든 글이었다. 그러나 힘찬 글씨 하나하나가 절규하고 있었다. 나를 바깥에 나가게 해달라고. 세상의 빛을 보게 해달라고.

그 외침은 신음은 영영 묻혀버렸고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우물 속 메아리로 남았다. 태운은 그 사실이 슬펐고 안타까웠다. 그리고 두려웠다. 그는 저 앞에서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준억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준억이라면 이 글을 읽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하지만 결코 준억에게 다가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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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장

제6장 짓궂은 장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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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왼손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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