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힐링이야 힐링.” 그녀가 내게 말했다. ‘언어의 온도’ 라던지, ‘어바웃 타임’ 등의 작품들을 최고로 꼽는다는 그녀는 나에겐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만약 내가 이 사람과 거리를 지나다닌다면, 사람들의 눈길은 좀 끌었으리라. 친구들은 나를 부러워할 것이고 나는 우쭐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은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런지 이 소개팅 자리가 조금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미리 정해 두었던 갓포집이 휴무인 것을 알게 된 후 급히 찾아온 이 곳은 야키토리 집이었다. 나는 혼자 종종 이 곳에 왔었는데, 커플들이 다정하게 식사하는 것을 볼 때마다 조금 부러운 마음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곳에서 화려한 여자가 나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와중에도 나는 오히려 혼자가 그리웠다.

  그녀는 술을 전혀 하지 못했고, 나는 술을 좋아한다. 아니 애주가라고 하는 편이 맞다. 삐걱대는 소개팅 아닌 소개팅 현장은 그녀만 신이 났다. 나는 독한 칵테일을 주문했고, 그녀는 논알콜을 시켰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그녀를 알면 알수록 나의 여성 취향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마치 감옥 안에 갇힌 사람 같았다. 그리고 그 감옥 안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멋진 외양에도 나에 대한 호감 표시에도 불구하고 난 그녀를 꺼내주려는 수고를 할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아니 그저 그녀의 비뚤어진 사고에 대한 반대 의견 하나도 건강히 내세우지 않은 채 시덥지않은 얘기만 하며 시간이 지났다.

  내 감정을 속이거나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가진 나에 대한 호감을 더 키우기는 매우 쉬운 일이었다. 오만스럽게도 나는 이러한 일련의 행위를 즐기는 편이라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녀는 약한 칵테일을 시도해보기도 하다가 얼굴이 빨개졌다. 약간은 귀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지만 나는 그냥 지금 보드 게임을 하는 기분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게임에 엔딩은 있듯이 나는 이정도로 우리의 관계를 정리하고 싶었다. 술이 조금 취한 나는 이제 맞장구도 적당히 쳐주지 않았고 적당히 흘려들었다. 그러다 이제 적당한 헤어짐의 시간이 왔다는 것을 말하고 우린 가게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녀는 넘어질 듯 나에게 안겼다. 뭐, 아무래도 나쁠 것은 없었다.

  “감당할 수 있겠어?” 그녀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인적이 드물어진 번화가에서 나는 걸음을 멈춰섰다. 너무 추웠던 날이라 사람들은 모두 목표를, 어디론가를 향하고 있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하룻밤을 때우려 그녀를 우리집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아직 목적지에 대해 말을 안했지만, 나는 5분 전 “택시를 잡자.”라고 말했고 그녀는 잘 캐치했던 듯 하다. 그렇게 택시를 잡으러 가는 와중에 이런 말을 들으니 나는 매우 의외였다. 나는 그냥 씨익 웃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감당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감당을 싫어하고 하지 않는 사람이다. 비겁한 나는 언제나 한 발을 빼곤 한다.. 그런 그녀가 이제 나에게 감당을 요구한다. 처음 만난 그녀에게 그런 짐을 부여 받을 필요는 전혀 없다. 심지어 그녀는 그다지 내 마음에 드는 사람도 아니었던 것이다. 내 미소는, 감당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너에게 밤은 쓸 생각이 있지만, 아침을, 낮을 쓸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 이후 과거와 같이 무언의 합의란 것이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나는 약간의 불편함을 가지고 택시를 탄다. 그녀는 별 말 없이 뒤따라 자리에 앉는다. 행선지를 말하고, 나는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끼며 기사에게 방향을 지시한다.




   일을 끝마친 후에는 퇴근을 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재택근무이다 보니 일거리가 제 발로 나가주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나는 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집에 가야하지 않느냐고 떠본다. 그녀는 눈치도 없이 집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더니 일어나 내 방을 구경한다. 예의 그 멋진 나체를 드러내며 방 여기 저기를 훑어보더니 다시 침대에 누운다.

  그녀가 말한다.

“나도 너와 같아.”

  우리는 대화를 주고 받는다.

“내가 뭐길래?”

“우린 그저 도망만 치고 있을 뿐이야.”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칫한 나는 금새 미소를 짓고, 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낀다. 난 다시, 한번도 안지 않은 것처럼, 그녀를 격렬히 안는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9 14:4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