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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몇 번의 밤과 몇 번의 낮을 거쳐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사실 보통 사람들이 하듯 “오늘부터 우리 1일!” 이런 것은 아니었다. 그냥 자연스레 연인과 같은 행동을 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우리가 미래를 약속하거나 사랑을 속삭이진 않았을지도 나는 그녀에게 연애 감정을 느꼈다. 나는 밤에 여자를 찾아다니기를 그만 뒀으며 그녀도 나를 자기라 부르며 항상 팔짱을 꼈다. 나는 때때로 이러한 스킨십에 위화감을 느꼈지만 대부분 이 다정함을 즐겼다. 나는 마치 20대 초반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영화를 보고 카페에 가는, 그런 데이트. 나는 바뀐 내가 신기할 뿐이었다.

사실 20대 초반 이래로는 카페에서 데이트를 한 적이 거의 없다. 아니 그보다는 데이트를 안했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좋아하는 여성과 카페에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커피는 매우 좋아해 여기저기 유명한 커피집을 다니며 맛을 테이스팅 할 정도로 좋아했지만 카페라는 공간에서 나누는 대화의 성격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달까. 내 생각에 카페에서의 대화는 소개팅에서의 대화랑 그리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우리는 취향을 얘기하거나 근황을 얘기하고 의미 없는 말을 대충 떠들기만 한다. 소개팅에서의 대화가 그렇지 않나. 서로를 파악하고 재고 자신을 계산하는 행동들. 나는 카페에서 여자를 만나면 계속 그런 형식의 대화를 이어나가게 되었다.

당연히 그건 카페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내가 낮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도 모른다. 나를 드러내기 쉬운 말을 안한다. 내 생각에 취향이란 남녀 관계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어차피 우린 서로를 공감할 수 없고, 이미 견고히 쌓아온 각자의 취향이란 이름의 성은 다른 사람의 함락을 쉬이 허락하지 않는다. 나를 드러내는 것도 마찬가지여서 드러낼수록 손해가 되는 것이다. 나는 겉이 속보다 훨씬 정갈한 사람이니 굳이 어지러진 내 속을 드러내기도 싫다. 밤의 술을 먹으며 하는 대화는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술을 마시며 더 자신을 드러내게 되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말은 완벽히 개소리다. 술에 취하거나 분위기에 취하면 우린 자신의 삶과 본모습에 감정을 넣는다. 낮에도 비슷하겠지만 밤과는 차원이 다르다. 과연 술 취해 울며 자신의 삶을 토해내는 게 진심일까? 단지 그 순간의 진실일 뿐이다. 술이 없으면 못할 말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낫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래서 나는 술을 마시며 얘기를 한다. 술을 마시며 낮의 이야기를 한다. 하긴 조금 다른 점은 있는 것이 상대방에게 공감을 이끌어 내거나 매력을 일으킬 의도가 없는 낮의 이야기를 한다. 말하자면 오히려 보통 사람들이 하는 낮의 이야기를 밤에 해야 하고, 밤에 하는 이야기를 낮에 해야 한다는 말이다.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햇빛이 비추는 카페에서 아무런 감정을 넣지 않고 이야기 해야 하고 자신의 취향이나 가치관을 을 전시, 과시 하는 일은 밤에 하면 충분한 것이다. 처음 만난 사람이 자신을 드러내며 자의식 과잉에 도취된 모습을 보인다면 누구도 그와는 자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나와 맞았다. 밤의 이야기를 낮에 하는 사람이었다. 낮의 이야길 밤에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같이 카페에 가는 것이 거리낌 없게 느껴졌다. 그녀는 낮에 자신의 인생과 감정에 대해 솔직히 얘기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아무런 연민이나 동정을, 아니면 만족과 긍정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이야기에 나는 항상 흥미가 동했고, 내면에 대해 더 궁금증이 생겼다. 한번은 가 그녀와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다.

“나는 오빠처럼 순탄한 인생을 살지 않았어.”
“나라고 마냥 순탄하진 않았는데.”
“내가 보기에 오빠는 온실 속 화초지.”
“그래서 넌 어떻게 살았는데?”
“나는 그냥 견디며 살았지. 견디며 사니, 뭐 그리 어려울 것도 없었어. 그러게, 그럼 나도 순탄한 건가? 호호.”

밤의 그녀는 내 욕구를, 애정을 자극시키는 말 이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뭐 야한 이야기나 사랑을 노래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사랑을 바라고, 적당히 이쁘게 꾸며낸 자신을 이야기 했다. 그녀의 화법은 매우 매력적이어서, 말 그대로 적당히 꾸며 낸 줄을 뻔히 알며 나는 점점 그녀에게로 빠져들었다.

그녀와 나의 애정은 점점 깊어 갔지만, 한동안 잠잠하던 내 중독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사실 원래 이러길 작정하고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녀와 만나려고 나왔지만 그녀가 급한 일이 생겨 나오지 못하게 되었고 나는 혼자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러다 한 여자가 내 옆자리에 앉으며 같이 따라온 친구에게 말했다.

“나 오늘 남자친구 생길 것 같아.”

나는 그냥 자리가 없어서 내 옆자리로 왔나보다 싶었고 그 말도 나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겠거니 했지만 예상이 틀렸다. 옆을 보니 딱 봐도 어리게 생긴 이 여자는 취했고 딱히 친구에게 말한 것도 아닌 것이었다. 나는 뭐 무시하기로 하고 술을 마셨다. 그랬더니 그 여자는 내 손을 낚아채며 이야기했다. 나도 적당히 맞받아치며.

“나 오늘 남자친구 생길 것 같다니까?”
“그래서요?”
“오빠가 내 남자친구야.”
“아닐 것 같은데,”
“내가 좀 병약히 간지나는 사람 좋아하거든.”
“간지나는 건 모르겠고 좀 병약해 보이긴 하지.”
“나랑 포켓볼 치자!”
“친구랑 잘놀아.”

사실 딱히 여자친구가 있어서 그녀와의 신의 때문에 이 여자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이 때는 “내가 여자친구가 있지”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초장부터 술이 취해 다가오는 여자를 난 싫어하고 너무나 어린게 뻔히 보였다. 짧은 원피스는 그녀와 잘어울리지도 않아 뇌쇄적인 느낌과는 거리가 먼, 뭔가 고등학교에 있는 양아치들이 크면 저렇게 입겠다 싶었다. 나는 오늘 밤은 집에 일찍 들어가고 싶어졌고 남은 술을 조금 빨리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그 여자가 또 소리쳤다.

“오빠 차례야!!”

뒤를 돌아보니 그 여자는 이미 삼각틀에 공들을 집어넣고 이미 처음 차례를 치고 난 후였다. 그 모습이 나는 조금 웃겼다. 그녀는 목소리가 큰데 매우 간드러졌고 혀가 꼬였다. 그래도 이 여자랑 엮이기는 싫어서 그냥 일어나서 화장실로 가기로 했다. 내가 걸어가는 와중에 그녀는 갑자기 달려와 나에게 넘어지듯 안겼고, 나는 오늘 밤이 짧지는 않겠구나. 하며 한숨을 쉬었다.

뭐 어쨌든 그날이 끝났다. 나는 일찍 돌아와서 몸을 다시 씻었다. 나는 항상 로라메르시에 바닐라 구어망드 바디 샴푸를 쓰는데, 이건 첫사랑의 바디 샴푸와 같은 것이다. 내가 이렇게 미쳐 돌아간 데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그녀는 나보다 9살 연상이었다. 나는 첫눈에 반했고, 사랑이 뭔지도 잘 모르는데 사랑한다고 말을 시작했다. 누나는 그냥 나를 귀엽게 보았고, 우린 약간 엄마와 아들 같은 관계로 지냈다. 그러다 어느날 누나 집에 놀러 갔고, 같이 듀데이트란 영화를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그 때 까지는 내가 사람과 잔다는 것을 상상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사실 여자를 좋아한 적도 별로 없었다. 사랑은 더 마찬가지리라. 영화가 끝났다. 그냥 재밌는 코미디 영화라 많은 대화의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린 그냥 침대에 기대어 맥주를 마셨다.

그러다 나에게 신호가 왔다. 영화를 보는 와중엔 그냥 생각이 없었는데, 작은 방에 어깨가 같이 붙어 있는 것이 나에겐 처음이라 성적으로 조금 흥분하기 시작했다. 정적 속에서 나는 자꾸 ‘뽀뽀 해야지, 뽀뽀 해야지.“ 라고 맘을 다잡았지만 조금 무서웠다. 몸이 맘처럼 안움직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꽤 귀여웠다.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며 정적 속에 20분 정도가 지나갔다. 나중에 들어보니 누나는 내 심중을 훤히 꿰어봤고, 귀엽게 지켜보고 있었다고 했다. 결국 나는 뽀뽀를 했다. 누나는 왜 그러냐고 웃었고 나는 그냥 그러고 싶었다고 미안하다 했다. 바로 직후 누나는 나에게 키스를 했다. 키스랄 키스도 제대로 해본 적 없던 나는 그냥 입을 열었고 누나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그 첫사랑 누나는 나에게 사랑한다 말한 적이 없었다.

“누난 왜 나 사랑한다고 말 안해? 나 사랑하지 않아?”

난 이렇게 항상 물었고 누나는 항상 이렇게 답했다.

“돌이킬 수 없을까봐.”

어차피 누나는 우리의 예견된 끝을 봤던 것이다. 21살의 공익이 30살이 된 누나를 책임 질 수는 없지 않은가, 누나는 이미 부모님의 많은 결혼 압박을 받고 있었고 나를 만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결국 우린 누나의 결혼 문제로 헤어졌고 나는 다시는 사랑을 하지 않겠노라 어린애 같은, 흔한 노랫 속 가사 같은 생각을 가졌다.
아, 그렇게 차가웠던 누나도 나에게 한 번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 “사랑해” 는 내가 평생 잊을 수 없을 말일 것이다. 어느새 성욕이 왕성한 남자가 된 나는 누나와 자주 잠자리를 가졌다. 어느 날에 여성 상위를 진행하고 있을 때 섹스가 끝났고, 누나는 내 위에 앉아서 조그만 목소리로

“사랑해”

라고 말했다. 나는 깜짝 놀랐고 이내 행복감에 젖어서 누나에게 다시 말해보라고 아양을 떨었다. 누나는 귀엽게도 자기는 아무 말 안했다 안했다 손사레를 쳤다. 아마 이 순간은 평생 잊을 수 없으리라.

샤워를 하고 나는 뻔뻔하게 여자친구와 카톡을 했다. 물론 어젯밤 일을 언급하진 않았다. 사실 나는 별로 죄책감을 느끼진 않았다. 그냥 다 ‘그런거지’ 하는 생각 정도이고 평상심 그대로 였다. 우리는 그 동안 낮부터 만나 커피를 마시고 저녁에 여자친구 집에 가 같이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잠자리를 가지는 식이었다. 나는 과거에 비해 다른 이 매우 안온한 상황에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을 가졌다. 내 지난 생활들을 꽤 후회할 정도였다. 카톡을 하다 여자친구는 오늘은 병원에 가 낮에 못봐서 미안하다 말했고 나는 그리 큰  상관없다고, 괜찮다 했다. 그래도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아 나는 이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구나 하는 새삼스런 생각을 가졌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9 20:1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