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편의 단편소설 같은 분절로 이루어진 옴니버스식 구성, 그 속에서 홍상수는 친절히도 블랙아웃으로 분절 사이 접합점을 가리켜준다. 그러면 감독이 시키는 대로, 흰 종이 위에다 네 인물, 혹은 네 이야기를 뜻하는 네 개의 점을 그려볼 수 있을까. 영화를 처음 보는 관객은 이 네 개의 점 사이에 선을 잇고, 화살표를 그리다가 기이하게 얽힌, 반복되는 삼각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모호한 삼각의 형상 여러 개는 성긴 그물이 되어 이 영화를 지탱하고, 나아가 영화가 담고 있는 90년대를 지탱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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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속에서 그물을 이루는 선들 중 가장 중요하고도 굵은 선을 꼽자면 단연 효섭과 보경 사이의 선이다. 영화의 처음과 끝을 담당하는 이 두 인물에 비해 다른 두 인물의 캐릭터 설정은 무력하면서도 의존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 의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민재는 효섭에 긍정적으로 의존하고, 동우는 보경에 부정적으로 의존한다는 점이다. 상황이 이러니 효섭과 보경 사이 선이 굵어질수록 민재와 동우는 다른 인물을 필요로 하게 되고, 우리는 처음 그렸던 네 점에다가 한 개(민수) 혹은 두 개(민수, 다방 레지)의 점을 추가로 그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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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못 흥미로운 것은 이 구도에 방향성, 혹은 부등호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민재를 향한 순수하고 구식의 애정을 가지고 있는 민수를 시점(始點)으로 한다면, 사랑의 화살표는 민재와 효섭, 보경과 동우를 경유하여 다방 레지에 종착한다. 그 과정에서 사랑은 콘돔이 터질 때처럼 뒤틀리고 오염되어 더 이상 사랑이 아닌 것이 되어 버리고, 결국 동우는 비뇨기과에 방문한다. 그 사실을 보경이 알아차리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러면서 영화의 네 번째 분절이 시작될 때, 우리는 영화의 시작을 담당한 삼류 소설가 효섭이 아니라 보경을 통해서 영화의 운명이 정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보경은 이 영화를 통틀어서 유일한 '정식' 불륜인이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불륜 상대 효섭에겐 불륜을 감당할 힘이 없다. 그래서 그는 민재에게 심한 욕설과 폭력을 퍼붓고, 보경이 그를 호출하는 순간에 부재한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진 그는 그리하여 죽음으로써 영화에서 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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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영화를 봤을 때는 민수와 효섭, 민재의 살해 씬을 보경의 꿈, 혹은 상상으로 이해하였다. 그만큼이나 이 씬은 (적어도 내 생각에) 보경의 꿈-장례씬과 맞닿아 있다. 그물의 한가운데 위치한 보경은 잠드는 줄도 모르고 꿈을 꾸게 되는데, 여기서 그녀는 본인의 사후를 상상한다. 자기 장례식에는 남편, 남편의 내연녀, 내연남, 내연남의 내연녀까지 총집합할 것이다. 웃으며 케이크를 나눠 먹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들의 모습을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 보고 싶은 것은 그녀의 욕망이다. 이 장면이 꿈인지 현실인지와 무관하게, 보경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와 별개로, 이 장면을 바라보는 관객 또한 100분만에 영화에서 가장 강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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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보경의 욕망과는 달리, 실제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효섭이다. 보경이 죽을 수 없다면 효섭이 죽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어쨌든, 얽히고설킨 그물 같은 실뭉치를 풀어내기 위해선 실의 양끝단이 아니라 정중앙을 잘라야 하는 법이니까. 정중앙에 위치한 가장 굵은 선, 바로 효섭과 보경 사이의 선이 그리하여 제거된다. 효섭이 죽음을 맞이하면서 그에게 의존하던 캐릭터였던 민재 또한 같은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살인자의 정체인데, 화살표의 시점이자 선과 순수의 화신이었던 민수가 바로 살인자 역을 맡는다. 민수에서 출발해 다방 레지에게로 가며 악화되었던 어떤 미지의 힘은, 아이러니하게도 시점이었던 민수에게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이런 정체 모를 윤회와 힘의 순환, 뒤틀린 수미상관 또한 하나의 홍상수식 루프라고 부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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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섭의 죽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보경은 집으로 돌아와 동우와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된다. 그러나 효섭이 이승을 떠난 이후에도, 보경-동우 커플은 굵은 선이 될 수 없다. 보경과 동우의 섹스는 동우와 다방 레지와의 섹스 혹은 민수와 민재 사이의 섹스, 즉 안전한 정중앙이 아니라 위태위태한 양끝단에서의 섹스와 닮아 있다. 사랑하고 싶다는 동우의 외침은 사랑한다는 외침으로 변하였으나 거기에 행복한 미래와 장밋빛 희망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결국 패배자 동우는 담배 핑계를 대며 집에서 나간 후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보경은 효섭에게 본인 걱정을 하지 말라는 말을 전한다. 다음 날 보경은 신문지로 표상되는 그물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 허공으로 간다. 그곳에서야 그녀는 삼각형의 그물들 사이에서 비로소 빠져나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영화를 보고 같이 이야기 나누는 공간으로 추천할 만한 커뮤니티가 있어서 링크 달았는데, 시간 나시면 한번 둘러보세요!

www.cineps.net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0 07:2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