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기(23)> 산티아고 순례길 29일차

무작정 서쪽으로 향하는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달을 보고 걷고, 걷다보면 해를 보며 걷게 된다. 걸을 때 유일한 불빛이었던 달이 점점 한 줄기 빛으로의 역할을 상실하고 이내 파란 물감 사이로 흩어져 하늘빛을 더해줄 때면 으레 목적지에 도착하곤 했다. 그리고 저녁을 늦게 먹는 스페인 문화 특성 상 숙소에서 쉬다가 느즈막히 저녁을 먹으러 나와보면 어느새 사라졌던 달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일출과 일몰, 그리고 하늘 높이 떠 있는 달에게 감동해본 적이 많다. 일출과 일몰은 언제나 경건하고 거룩했다. 지구에서 제일 큰 빛이 떠오르고 지는 과정이다. 일출과 일몰을 바라보거나 안개 속에서도 강렬하게 빛을 내뿜는 해를 볼때면 왜 고대 이집트인들이 태양신을 최고의 신으로 섬겼는지 이해할 것 같다. 휘영청 밝은 달은 왠지 모를 신비감을 자아내곤 하였다. 캄캄한 밤하늘 속 오직 나만의 당신의 유일한 빛이라는 듯 온몸으로 존재감을 피력한다. 그 빛은 모든 사물을 환히 비추지는 못하지만 사물의 전체 모습이 또렷할 때 보지 못하는 사물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길을 걸으며 태양에게 천 번 달에게 백 번 정도 감동했다. 하지만 별은 달이 있을 때면 달빛이 반짝이며 부서지는 듯한 착각을 안겼을 뿐 별 그 자체로 감동을 받아본 적이 없다. 별도 그 자체의 빛이 있지만 더 큰 빛에 가리는 탓이다.

오늘 나는 산티아고로부터 약 100km 지점인 사리아를 지났다. 사리아에서 묵을까도 했지만 사리아에서 약 5km 더 떨어진 바르바델로까지 왔다. 이 곳은 가로등도 몇 개 없는 촌동네다. 짐을 풀고보니 주변에는 바도, 레스토랑도, 식료품점도 없었다. 사리아에 그냥 있었더라면 적어도 저녁을 굶을 걱정은 안 했을텐데 하고 후회했다. 다행히도 알베르게 호스트가 300m쯤 떨어진 근처 알베르게에서 식사도 같이 판다고 하여 그 알베르게까지 가서 식사를 하고 왔다. 하마터면 더 멀리 가려던 욕심 때문에 오늘 저녁을 쫄쫄 굶을 뻔 했다.

여느때와 같이 순례자 메뉴와 와인 한 병으로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던 참이었다. 기센 아주머니 한 분이 식당을 지키고 계셨다. 스페인어로 따다다 쏘아붙이고 대답을 못하면 뭐라 또 쏘아붙인다. 밥먹는 내내 말을 걸어 체할 뻔 했다. 소화라도 제대로 하기 위해 일부러 멀리 돌아오면서 습관처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달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나를 감싼 것은 전에 마주한 적 없던 수천 줄기의 별빛이었다. 달이 사라진 지금 별들은 한순간에 자신을 드러낸다. 큰 별도 있고 작은 별도 있다. 조금 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니 수천 개의 별은 수만으로 거듭난다.

그래, 너희들이 거기에 있었구나 했다. 달에 가려 빛을 내지 못하지만 언제나 별들은 거기에 있었을테고, 낮에도 역시 햇빛에 가렸을 뿐 별들은 저 위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별들은 자신들이 제일 돋보일 수 있는 단 한 순간을 찾아 빛을 내고 있다. 지금만큼은 아무리 소박하더라도 별들이 제일 아름다운 순간이다.

언제나 태양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세상에서 제일 높게 떠서 세상 제일 구석진 곳까지 밝게 비추고 싶었다. 달과 같은 사람도 좋다. 달이 밝으면 밤길을 걷는 사람은 달빛에만 의존해 걷기도 한다. 그러나 이 뒤에 가려진 별과 같은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별과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지 여태 생각조차 못 해보았다.

별 구경을 하며 글을 쓰다 문득 춥다는 것을 느끼고 이제 그만 알베르게로 돌아가고자 했다. 오늘은 알베르게에 아무도 없어 나 혼자 호젓한 밤을 보낼 수 있다. 그런데 알베르게 앞에 선 나는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알베르게 호스트가 퇴근하면서 문을 잠궈버린 것이다. 이 마을에 알베르게는 이곳 하나밖에 없고 나는 지금 반팔에 후드집업 하나를 걸치고 슬리퍼를 신고 밖에 나와있다. 산골이라 그런지 기온은 영하다.

알베르게 주인에게 전화를 했는데 전화기가 꺼져있었다. 알베르게 주변을 돌며 들어갈 구멍을 찾아봤지만 들어갈 구멍은 커녕 물 샐 틈도 없어보였다. 괜히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고 당겨보았다. 문이 부수어질 듯이 흔들리긴 했지만 열리진 않았다. 그렇다고 문을 부술 수는 없으니 참 답답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얼어죽는 것보다야 낫겠다고 생각하고 문을 부수려던 찰나에 식당 주인이 떠올랐다. 이 근방에서 유일하게 만난 사람이었다. 식당까지 300m를 슬리퍼가 벗겨지도록 뛰어갔다. 시간은 이미 꽤 많이 흘러 거의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너무도 당연히 식당 문은 잠겨 있었다. 식당 문 옆에 초인종이 보여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민폐라고는 생각했지만 생존에 대한 욕구가 더욱 컸다. 초인종을 연타하니 짜증에 절은 목소리가 들렸다. 랩 같이 빠른 스페인어 중에 닫았다는 단어를 주워들었다. 문 닫았으니 돌아가라는 말이었던 것 같지만 그만해도 하늘에서 동앗줄이 내려온 느낌이었다.

다급히 도와달라고 외치자 문이 열렸고, 구글 번역기에 상황을 적어 보여드렸다. 그러자 갑자기 태도가 확 변하며 들어오라며, 문제 없다며 나를 꺼져가던 벽난로 앞으로 안내했다. 남편분이 거의 다 꺼졌던 벽난로의 불길을 다시 살리는 동안 아주머니는 어디론가 급히 많은 전화를 하셨다.

추위와 공포에 얼어붙은 몸과 마음이 벽난로 앞에서 주인 아주머니가 타주신 코코아로 사르르 녹았다. 적어도 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자 그제야 식당 주인 부부에게 민폐를 끼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송하다고 연거푸 말씀드리는데 두 분 모두 내게 괜찮다고 걱정말라고 하시며 오히려 안아주셨다. 아까 식사 중에 성미 사나운 아주머니라고 속으로 짜증낸 것이 더욱 죄송해졌다. 이윽고 문제가 해결된 듯 남편분이 나를 데리고 다시 알베르게 앞으로 갔다. 연장을 가지고 문을 어찌저찌 따주셨고, 나는 다시 내 안식처로 들어올 수 있었다.

별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하고 고민했었다. 따지고 보면 대부분의 별은 태양과 같다. 사실 태양 따위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큰 별들도 있다. 별들 하나하나는 누구보다 밝고 뜨겁겠지만 멀리 떨어진 이 곳에서는 차갑고 작은 빛줄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빛은 세상에 의존할 수 있는 빛이 그 무엇도 없을 때 제일 크게 빛날 것이다. 오늘 태양같지는 않았지만 별 같던 부부를 만났다. 까미노 제일 어두운 길에 제일 밝게 내 앞을 비춰준 부부였다. 아마 한국에 돌아가서도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태양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아직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내가 태양이 아닌 별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 하나를 오늘 품게 되었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5 10:5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