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인사 드립니다.

시간이 갈수록 학생 자치가 외면 받습니다. 그나마 학생자치가 살아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정경대 역시 그 흐름을 빗겨가지는 못합니다. 몇 년 전, 여느 해처럼 겨울이 되고 학생회 선거철이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던 과반의 익명게시판에 이런 글이 올라왔습니다. ‘학생회가 꼭 있어야 해?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새터 준비하면 안 돼?’ 글에 달린 댓글이 더 마음 아팠습니다. ‘새터 준비하겠다고 모이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학생회의 필요성이 의심 받는다는 것. 학생회장 출마를 고민하던 제게 주어진 가장 큰 숙제였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맞부딪히게 되는 문제는 여전히 많은데 함께 힘을 모아서 문제를 해결해보자는 학생회에 대한 시선이 냉담해지는 이유를 찾고 싶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얻은 답은 학생회를 통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불신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학생회가 말만 많지 정작 실제적인 변화는 만들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일은 열심히 하는데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등록금 부담이 크고, 교육 환경이 열악하고, 진로를 찾아가는 과정이 고되긴 하더라도 번거롭게 학생회에 힘을 보태 소득 없는 일을 하기보단 차라리 나 혼자 해볼 수 있는 일을 찾아보는 편이 훨씬 낫겠다는 불신이 팽배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학생회라는 공간과 그 안에서 힘을 모아 공통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문화가 더 이상 존재하기 어렵겠다는 위기감 속에 임기를 시작했습니다.

올해 초, 우리 학교 본관 앞에는 텐트가 하나 생겼습니다. 시간강사의 열악한 강의 환경과 턱없이 낮은 임금을 바로잡을 것을 요구하는 텐트 농성이었습니다. 3월 말, 학교 안의 학생회장들이 모두 모인 전체학생대표자회의는 시간강사를 지지하는 것이 교육투쟁의 의제가 될 수 없다며 ‘시간강사 투쟁 지지’안을 부결시켰습니다. 멀리 보지 않더라도 친구 중 누군가는 졸업하면 대학원에 진학해서 강사가 될텐데 그게 어떻게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됐고, 대체 이 문제를 왜 등록금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함께 이야기해서는 안되는 것인지 납득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학생회도 ‘나’만 생각하는 공간일 수 밖에 없는 것인가라는 회의감이 들더라구요.

그러고 몇일 뒤 아침, 너나 할 것 없이 참 많은 사람들이 시간강사를 지지하자는 대자보를 붙였습니다. 전학대회의 결정을 비판하는 여론이 온 학교에 분분하게 일었습니다. 학우들의 마음이 차갑다고 느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습니다. 학생회가 이기적인 공간이 된 것이 아니라 학생회장인 제가 학우들에게서 지혜를 빌리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된 결정을 막아낼 수 없었던 것인데 저는 그저 학우들만 탓했습니다. 그렇게 그 다음주에 다시 열린 전학대회에서 시간강사 지지안건은 통과되었습니다.

그래서 꼭 지키고 싶었습니다. 우리의 문제를 함께 헤쳐나가고, 누군가의 아픈 가슴을 나눌 수 있는 그런 학생회가 사라져가는 현실이 ‘별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는 비겁한 나랏님 탓이 아니라는 믿음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잘못된 부분은 바로잡고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아오는 그런 1년으로 다시 학생회가 살아나는 길을 열어보고 싶었습니다.

학교를 다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런가보다 하고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회실의 문을 두드려 이야기해볼 수 있는 그런 학생회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제가 남자라 들어가 볼 수는 없습니다만 악취가 진동해서 화장실을 못 쓰겠다며 학생회실을 찾아온 여학우, 전공탐색과 신입생 필수교양시간이 매 학기 겹쳐서 수업을 들을 수가 없다며 고민을 털어놓던 새내기, 세미나를 해야 하는데 전기를 절약한답시고 방학에는 강의실을 빌려주지 않는 학교에 대해 하소연하던 학회장, 3월 초 시간강사 처우 개선 투쟁 지지를 학생 대표자들이 부결시켰을 때 우리 단과대가 나서서 다시 되돌리면 안 되냐고 호소하시던 학우분의 쪽지까지. 깊은 불신이 모두 해결되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하나하나 이렇게 해나가면 할 수 있겠다는 용기를 주셨던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선언적인 투쟁이 아니라 실제적인 생활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학생회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등록금, 생활비, 대형강의, 영어강의 문제 등 우리 삶을 팍팍하게 만드는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대자보를 붙이고 정대 후문에서 함성을 외치고 학내 집회를 여는 투쟁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변화를 통해 학우들께 ‘힘을 모으면 문제는 해결된다.’는 믿음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총선 국면에서 국회의원 후보들에게 등록금, 생활비 문제 대책을 요구하는 ‘호안인 정책요구안’을 1달여간 학우들께 묻고 준비해 발송하였고, 다른 대학의 학생들과 연대하여 실제 140명에 달하는 국회의원들에게 반값등록금을 약속받았으며, 모든 정당이 대학생 문제 해결을 주요 정책으로 내세울 수 있게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대형강의와 영어강의에 대한 학우들의 오랜 불만에 대해 한 학기 동안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해 학우들께 검증받고 서명을 통해 지지받는 과정을 만들어 학교와 협상을 함에 있어 실질적이고 세부적인 개선 약속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한 발 한 발 조금씩 나아가면 변화라는 것이 말만 번지르르한 것이 아니라 체감할 수 있는 것이 될 수 있겠다는 믿음을 배웠습니다.

몇가지 실험과 도전을 뒤로 하고 저와 45대 호안정대 학생회는 이제 물러갑니다. 좋은 모습만 보여 드리지 못해 때론 실망과 한숨을 안겨드렸을 일들을 못내 다 책임지지 못하고 자리를 떠나는 마음에 자꾸 뒤를 보게 됩니다. 어설프게나마 믿고 소망했던 것들이 학우들의 삶 속에 한 자락이라도 가닿을 수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20대 초반, 모자란 것 투성이에 좌충우돌하던 철없던 시간들 속에 제가 이 공간과 사람들에게 배워가고 빚진 것은 너무도 많은데 정작 저는 내어줄 것이 많이 없다는 사실에, 한편으로는 고맙고, 또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끝 인사를 쓰는 것이 쉽지가 않네요. 지켜봐주신 많은 학우들께 너무도 감사드립니다. 함께 여기까지 뛰어온 집행부 친구들은 언제나 제 가슴에 아쉬움이고, 자랑이고, 고마움일겁니다.

간지나고 일잘하는 프로보다는 노력하는 미련한 아마추어에게 왠지 모를 믿음과 정감이 가는 세상이길 바라면서, 다시 또 이 길을 고민하고 호흡해 갈 이들이 한결 영근 열매를 맺어내길 응원합니다. 제게는 언제나 배움이었고, 희망이었고, 주저함과 두려움을 이겨내는 당당함이었던 호안정대 학생회, 참 많이 그리울거에요.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2년 10월 29일

시대를 꿰뚫는 청년의 눈빛, 민족고대 제45대 호안정대 학생회장 김형남 드림